중국- 쓰촨성(사천성)

제갈량을 모신 사당 청두 무후사

꽃돼지. 2024. 10. 25. 23:32

제갈량을 모신 사당 무후사

  

2024.    10.  25.

 

2024.   10.  17 ~  21,   4박  5일 일정으로  라온제나 테마여행 동행 15명이 함께한 중국  쓰촨성(四川省)여행이다. 

 

10월 20일 여행 4일  두번째 여행으로

다른 도시에도 무후사가 많지만 청두의 무후사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임금과 신하가 함께 공양된 사당이고 중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보여주는 삼국 유적박물관으로 삼국성지 (三国圣地)로 인정받고 있는  제갈량을 모신 사당 무후사로 향한다. 

 

 

 

 

 

쓰촨성의 성도인 청두는 삼국시대 촉나라로유비와 제갈량의 사당 ‘무후사’가 유명하다.

 

 

 

 

지금의 무후사는 전형적인 사합원 양식으로 청나라 강희제 때(1672년) 중건된 것이다.   2008년에 국가 1급 박물관으로 지정되면서 규모가 더욱 커져,  15만㎡에 이른다.

 

 

 

청두 무후사는 서진(西晉) 시기인 260년대에 건설되었으며, 유비의 무덤이 있는 곳인 한소열묘(汉昭烈庙)와 맞닿아 있었는데 명나라 초반에 한소열 묘와 하나로 합쳐졌다고 한다.       현재의 무후사 건물은 1672년 청나라 때 재 조성된 건물이다.

무후사의 주요 건물은 모두 남북향의 중심선상에 위치해 있는데, 남쪽으로부터 대문과 이문(二门)을 거쳐 한소열묘, 무후사 건물이 있고 무후사의 뒤에는 삼의묘(三义庙)와 결의루(结义楼) 등 건물이 있다.

 

 

 

 

중국  쓰촨성 청두시 무호사 (武侯祠)에 있는 촉한의 초대 황제인  소열황제 유비 (昭烈皇帝 劉備)의 능묘(陵墓). 유비의 묘는 혜릉(惠陵)이라고 불린다. 이곳은 유비의 능묘이지만 동시에 그의 신하인  제갈량(諸葛亮)의 사당(무후사)이기도 하며 유비 외에도  관우.  장비  등 그와 생사고락을 같이한 촉한의 신하들 역시 같이 기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두보의 고백행이라는 시에도 나오듯이 이미 당나라 이전시기부터 유비의 묘와 제갈량은 같은 사당에 모셔져 있었던 것 같다.

 

 

 

 

안내도

지금의 무후사는 전형적인 사합원 양식으로 청나라 강희제 때(1672년) 중건된 것이다. 2008년에 국가 1급 박물관으로 지정되면서 규모가 더욱 커져, 총 15만㎡에 이른다.  셩내는  삼국 역사 유적구(三国历史遗迹区), 진리민속구(锦里民俗区), 삼국 문화 체험구(三国文化体验区)로 나뉘어져 있다. 핵심 구역은 삼국 역사 유적구 이다.

 

청두 무후사는 서진(西晉) 시기인 260년대에 건설되었으며, 유비의 무덤이 있는 곳인 한소열묘(汉昭烈庙)와 맞닿아 있었는데 명나라 초반에 한소열묘와 하나로 합쳐졌다고 한다.   현대의  무후사 건물은 1672년 청나라 때 재 조성된 건물이다.

무후사의 주요 건물은 모두 남북향의 중심선상에 위치해 있는데, 남쪽으로부터 대문과 이문(二门)을 거쳐 한소열묘, 무후사 건물이 있고 무후사의 뒤에는 삼의묘(三义庙)와 결의루(结义楼) 등 건물이 있다.

 

 

 

 

 

다른 도시에도 무후사가 많지만 청두의 무후사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임금과 신하가 함께 공양된 사당이고 중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보여주는 삼국 유적박물관으로 삼국성지 (三国圣地)로 인정받고 있다.

 

면양에 세워진 무후사는 촉한 당대에 지어졌지만 성도의 무후사는 성한의  이웅이 촉한이 망한 지 50여 년 만에 무후사를 만들고, 지금의 장소에 옮겼다. 이민족 정권인 성한 정권 입장에선 사천 주민들의 추앙을 받는 제갈량의 위상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5세기 이후에는 유비와 제갈량 두 사람이 각각 명군과 충신의 본보기로 합사된 것이 확인되고, 적어도 명나라 홍무제의 아들 촉헌왕 주춘이 제사를 지낸 것이 확인되니 그 연원이 오래되었다.

이후에도 두보를 비롯한 많은 명사들이 이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현재 남은 옛날 건축물 상당수는 명나라 말에 난리 때 불에 타 청나라 강희제 때 재조성된 것이고, 성도 무후사 박물관으로 1961년에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문 앞에는 크게 한소열묘라고 적혀있으나, 사람들은 모두 무후사라 불렀다.  '소열은 유비의 시호이다.

중국에서 유일하게 주군과 신하가 함께 모셔진 사당으로  소설 ‘삼국지’ 마니아에게는 성지로 통한다.   이곳은 223년에 사망한 유비의 묘로, 정문에는 유비의 시호인 한소열제(漢昭烈帝)를 따서 ‘한소열묘(漢昭烈庙)’라고 적힌 편액이 걸려 있다.   하지만 보통은 ‘한소열묘’ 대신에 ‘무후사’라고 부르는데, 이는 무향후(武鄕候) 제갈량을 모신 사당이란 뜻이다. 주군인 유비를 제치고 제갈공명의 사당으로 더 알려져 있는 것으로 볼 때 쓰촨에서는 제갈공명의 인기가 유비보다 더 높은 듯하다.

 

 

 

 

무후사에 들어서면 사당과 사당을 연결하는 산책로엔 푸른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한소열묘 본전의 중앙에는 3m 높이의 유비 조각상이 서 있으며 동쪽 별채에는 관우 부자의 조각상과 부하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으며 서쪽 별채에는 장비와 자손들의 조각상이 있다.    북쪽에 위치한 본당을 중심으로 남쪽을 향해 하나의 축을 이루는 구조다.

 

 

 

 

중국에서 유일하게 주군과 신하가 함께 모셔진 사당으로, 소설 ‘삼국지’ 마니아에게는 성지로 통한다.   원래 이곳은 223년에 사망한 유비의 묘로, 정문에는 유비의 시호인 한소열제(漢昭烈帝)를 따서 ‘한소열묘(漢昭烈庙)’라고 적힌 편액이 걸려 있다.   하지만 보통은 ‘한소열묘’ 대신에 ‘무후사’라고 부르는데, 이는 무향후(武鄕候) 제갈량을 모신 사당이란 뜻이다.   주군인 유비를 제치고 제갈공명의 사당으로 더 알려져 있는 것으로 볼 때 쓰촨에서는 제갈공명의 인기가 유비보다 더 높은 듯하다.

 

 

 

 

삼절비(三绝碑)

제갈량의 공덕을 칭송하는 비석으로 정식 명칭은 촉한승상제갈무후사당비(蜀漢承相諸葛武候祠堂碑)’이다. 809년 당나라 때 헌종(憲宗)이 세운 이 비석은 문장, 서예, 석각 모두 당대 최고의 명인이 참여하여 완성한 것으로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장시철이 문장을, 고등이 비석을 세웠다.

 

 

 

 

대문을 들어서니 양쪽으로 정자가 세워져 있다당나라와 명나라 비석을 보존하고 있다복판 길을 따라가면 이문(二門)이 나온다.

 

청두 무후사 한소열묘 이문의 '명량천고' 편액은 ‘밝은 군주(유비)와 어진 신화(재갈량)가 천고의 역사를 넘어 흘러 전해진다’는 뜻으로 영원히 오랫동안 빛나는 인물이라는 ‘명량천고(眀良千古)’가 걸렸다. 청나라 강희제 시대 쓰촨 제독으로 부임한 오영의 필체다.

 

 

자세히 보면 해와 달이 있는 명(明)이 아니라 눈(目)과 달이 붙었다. 명나라 국호를 쓰지 않으려 했다고 흔히 말한다. 강희자 전에도 나오는 이체자다. 유비가 숨을 거둔 펑제(奉節)의 백제묘 명량전에도 똑같은 글자가 있다. 비슷한 시기의 쓰촨 총독 채육영의 필체다. 당시 밝을 명에는 눈도 달렸던 듯하다.

 

 

 

 

 

 

 

 

 

 

과청(过厅)에는 삼국지와 연관된 자료들이 전시되고 있는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이다. 위나라 정벌을 결심한 제갈량이 촉한의 2대 황제 유선에게 바친 글로, 이곳에 전시된 출사표의 초서 필체는 명나라 때 청두의 문인 백린(白麟)이 쓴 것이다. 한때 악비(岳飛)의 친필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는데, 이는 백린이 술에 취해 글을 쓰다가 자신의 이름이 아닌 악비의 이름을 적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출사표(서기 181~234년)를 던지고 북벌을 떠났던 개갈량의 마으이 얼마나 비장했을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또 다른 설은

제갈량이 위를 정복하려고 출정할 때 유비의 아들 유선에게 써서 올린 글 출사표를 송나라의 충신 악비(岳飛)가 송 고종 소흥 8년(1138)에 옮겨 쓴 글이라는 설이 있는 후 출사표...

이것은 촉한의 명신 제갈량과 송대의 충신 악비의 정신이 결합된 것으로 서예적, 문학적 가치는 물론 충절의 귀감이 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높이 평가된다

.

 

 

 

남송의 장수이자 송대의 대표적인 서예가로 손꼽히는 악비(서기 1103~1142년)는 금나라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진회의 농간으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서른일곱의 나이로 처형되고 마는데 악비가 제갈공명(서기 181~234년)의 출사표를 썼는데 그것이 천하의 명필이다.

 

 

 

 

무후사 정문에 들어가 "무후사(武侯祠)"라는 편액이 걸린 문을 들어서면, 앞에 있는 전당(殿堂)의 복도가 문신무장랑(文臣武將廊)이다.

이문을 넘어서면 양쪽에 긴 복도 왼쪽에 무장이 도열해 있다. 삼국지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이다. 조운을 필두로 요화와 황충을 비롯해 무장이 14명이다. 모두 28명이 전투라도 벌일 기세로 앉아 있다.

 

 

 

 

 

 

 

 무장 복도의 요화와 황충

 

 

 

 

 

 

 

 



 

 

 

 

 

이문을 넘어서면 양쪽에 긴 복도가 있다. 오른쪽에 문신들로 수장인 방통과 함께 앉은 간옹을 비롯해 문신이 14명으로 청나라 시대 무대극 복장으로 치장하고 있는데 치적을 기록한 비석이 하나씩 놓였다.

 

 

 

 

 문신 복도의 방통과 간옹

 

 

 

 

 

 

 

 

 

 

 

 

 

 

 

 

 

 

 

관우, 장비 등의 문· 무관 28인의 상은 옆 동(棟)에 있고 벽에는 그들의 문장과 업적을 기리는 액자와 연(聯)이 전시되어 있다.

 

 

 

 

좌우로 촉한(蜀漢)시대 유명한 문관(文官)과 무장(武将)들의 흙으로 빚은 상이 자리잡고 있다. 한소열사당 내부에는 촉한의 역사적 인물들을 상징하는 토우가 41점에 달한다.   토우들은 청대(淸代)의 조각가들이 만들었으며 촉한의 군신서열에 따라 배치돼 있다.   사당 왼쪽에는 무신, 오른쪽이 문신들이다.

 

 

 

 

 

 

 

 

 

 

유비전(刘备殿)은 ‘소열사(昭烈司)’라고도 한다. 이문(二门)을 통과하면  유비전은 정문으로 들어가 최초의 건물인데  사당 정중앙에 황금으로 치장된 유비의 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 편전에는 관우 부자와 주창(周仓)의 상이 있고, 서쪽 편전에는 장비와 그 아들, 손자의 상이 있다.   또한 양쪽으로 이어진 복도 중에서 동쪽 복도에는 촉한의 문신들, 서쪽에는 무장들의 상이 늘어서 있어 흥미롭다.

 

 

 

 

성관금석(정성을 쏟으면 쇠와 돌도 뚫는다)이라 쓰인 현판이 모셔져 있다.

 

 

 

 

왼쪽의 장비

 

 

 

 

서쪽 편전에는 장비와

 

 

 

 

 

그 아들 장포와 손자의 상이 함께 모셔져 있다.

 

 

 

 

 

 

 

유비전 벽에는 공명의 정치· 군사상의 전략 사항으로 유명한 융중대(隆中對)의 액자가 걸려있다.

 

 

 

 

유비전,  사당 정중앙에 황금으로 치장된 유비의 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청두는 쓰촨성의 성도이자 유비가 세운 촉나라의 수도였다.

 

 

 

 

전신을 도금으로 꾸몄으며 9줄 면류관을 쓰고 있다.   양손으로 다소곳하게 제례에 사용하는 옥기인 규장(珪璋)을 들고 있다.   자세히 보니 북두칠성을 새겼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양쪽 시위가 황제의 상징인 전국옥새(傳國玉璽)와 상방보검(尚方寶劍)을 들고 있다. 대낮인데도 깜깜하니 조명을 받은 유비만 돋보인다.

 

 

 

 

유비의 손자 유심 상

촉한이 망할 때 끝까지 항전을 주장하여 싸우다가 전사한 유비의 손자 유심의 상은 할아버지 유비 옆에 그대로 세워져 있지만 유비의 아들 유선 상이 없는 이유는 유선 제위 시 싸움을 하지 않고 그대로 항복하여 나라를 말아먹은 어리석은 군주라고 하여 남송때 없애버렸다.   유선의 자손은 영가의 난 당시 대가 끊겼다.

 

 

 

 

한소열묘 전각 앞에는‘업소고광’편액이 걸려있다.   ‘한나라를 창업한 고조 유방의 제업을 이어 받았다’는 뜻으로 후한의 정통성을 보여준다.  '대업을 크게 발전시켰다는 '업소고광'이라는 편액 

 

 

 

 

 

 

 

 

관우의 상

 

 

 

 

 

 

 

동쪽 편전에는 관우 부자와 주창(周仓)의 상이 있다.

 

 

 

 

 

 

 

 

 

 

 

 

 

 

 

 

 

촉의 1대 황제 유비 사당의 상,  안으로 더 들어가면 한소열묘 대전이다.   3m 높이의 유비가 앉아있다.   

 

 

 

 

 

 

 

 

한소열묘 전각 앞에  '대업을 크게 발전시켰다'는  ‘업소고광’ 편액이 걸려있다. 

 

 

 

 

제갈량의 무후사가 정전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 유비보다 제갈량을 숭배하는 경향이 강하다.

 

 

 

 

한소열묘와 제갈량 사당 사이에 과청(過廳)이 있다. 뚫린 건물이라는 뜻이지만 무후사 대문이다. 편액은 문학가인 궈모뤄가 썼다. 유적지에 남긴 필체가 워낙 많아 한눈에 알기 쉽다.

오른쪽 기둥에 적힌 글자가 익숙하다. '촉상'에 나오는 삼고빈번천하계(三顧頻煩天下計)다. 중국 공산당이 결성된 1921년 1차 전국 대표로 유명한 둥비우가 썼다. 왼쪽 기둥에 일번오대고금정(一番晤對古今情)이라는 소회를 이었다. ‘한번 대면해 고금의 회포를 풀리라’라는 소망이다. 부주석까지 오른 당 원로이니 기둥 한자리를 차지할 만하다.

 

‘무후사(武候祠)’라고 적힌 현판에 주목하자.   중국의 저명한 극작가이자 사학자였던 궈모뤄(郭沫若)의 필체다. 

 

 

 

 

무후사(武候祠)의 정식 명칭은 유비의 사당을 뜻하는 한소열묘이다. 촉나라 한소열은 소열황제 유비를 뜻한다고...

 

 

 

 

무후사 본전 제갈량전 사당에 적혀있는 ‘명수우주’

현판에 새겨진 명수우주는 '이름이 온 천하에 울린다.'라는 뜻으로 당나라 시인 두보가 무후사에 들러 제갈량을 기리며 쓴 시의 한 구절이다.

 

 

 

 

 

 

 

 

 

 

무후사 정원당 앞의 향로를 잡고 있는 병사 석상, 역사 인물을 보다가 사병의 수더분한 인상을 마주하니 편안해지는 기분이다.   그냥 친구 같은 느낌이다.

 

 

 

 

제갈량을 봉공하는 전각 앞에 이른다.   향로를 붙잡고 있는 조각상이 보인다.

중국3세기를 풍미한 유비. 징비. 관우를 비롯하여 촉나라의 여러 명장을 거느린 전설의 전략가 제갈공명, 그 제갈량의 위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사당이다.

 

 

 

 

 제갈량 사당인 무후사 정원당 제갈량전

5칸 크기인 본전은 정원당(靜遠堂)이다. 제갈량이 아들에게 남긴 계자서(誡子書)가 출처다.   마음이 깨끗해야 뜻을 세울 수 있고 마음이 편안해야 포부를 이룰 수 있다는 ‘담박명지(澹泊明志)  영정치원(寧靜致遠)’에서 따왔다.

 

 

 

 

 

불감 안에 앉은 제갈량은 청나라 강희제 시대인 1672년에 제작됐다.   깃털 우산을 들고 두건을 두르고 도포 입은 유학자 모습이다.   시동 둘이 병서와 보검을 들고 있고 벽에는 아들인 제갈첨과 손자 제갈상이 보좌하고 있다.

 

 

 

 

 

 

 

 

 

 

 

 

 

 

 

 

제갈량의 무후사가 정전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 유비보다 제갈량을 숭배하는 경향이 강하다.

 

 

 

 

 

 

 

제갈량

사실 유비가 촉을 통치한 기간은 6~7년 가량이지만 제갈량은 촉의 재상으로 10년 넘게 통치하며 존경을 받았던 점이 주된 이유로 보인다. 물론 소설 삼구지연의에서 제갈량이 거의 진주인 공급으로 각색된 점도 이런 숭배의 원인 중 하나일 듯 ~

 

 

 

 

제갈량전 구리 북  제갈고(诸葛鼓)는 공명이 남쪽을 정벌하면서 만든 것으로 낮에는 그것으로 밥을 짓고 밤에는 경보를 발했다고 한다.

 ‘제갈고(诸葛鼓)’라고 불리는 이 북은 원래 남방 소수 민족의 악기인데, 당시 쓰촨 지방에서 민족 간의 문화 교류가 있었음을 알려 주는 사료로서 각별한 의미가 있다.

 

 

 

 

 

 제갈량 손자 재갈상 상이 모셔져 있다.

 

 

 

 

 

 

 

 

 

 

  '삼고초려'를 나타낸 조각상이다. 삼국시대에 유비가 제갈량을 얻기 위해 직접 제갈량의 초가집으로 세 번이나 찾아갔던 일화이다.

 

 

 

 

한소열 사당을 나와 유비가 잠들어 있는 혜릉이 있는 곳으로 가는 곳에 연밭 연지가 있다.

 

 

 

 

 

 

 

연밭을 지나면 혜릉 입구이다.

 

 

 

 

 

 

 

계하루

 

 

 

 

 

 

 

 

 

 

 

 

 

 

붉은 담장과 대나무가 어울리는 길이 참 좋다.

 

 

 

 

网红墙

 

 

 

 

혜릉으로 이어지는 100m 가량의 길은 무후사의 포토스팟으로 유명하다. 유려한 곡선의 적갈색 벽 위에 드러난 푸른 대나무 숲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청두 최고의 인생사진을 남겨볼 수 있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다.

 

 

 

 

 

 

 

혜릉과 무후사를 이어주는 붉은 담벼락의 좁은 길이 있는데, 여기가 바로 무후사 최고의 포토 존이라고 하니 사진을 남기는 것도 잊지 말자.

 

 

 

 

 

 

 

 

유비의 묘인 혜릉 입구

 

 

 

 

 

 

 

 

 

 

'천년이 지나도 오히려 늠름하다'는 '천추늠연'   현판은 청나라 광사제(1875~1908) 갑진년(1904) 12월에 썼다.

 

 

 

 

 혜릉  유비묘(刘备墓)

청두 무후사가 다른 무후사와 다른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유비의 묘인 혜릉이 있는 것이다. 삼국지의 삼국인 유비. 조조. 손권 중 지금까지 무덤이 남아 있는 건 유비가 유일하다.이 능묘는 제갈량이 유비를 위해 직접 선택한 자리라고 한다.

 

 

 

 

유비의 혜릉

원추형의 능묘는 높이 12m, 둘레 180m로 작은 구렁처럼 보이고, 수목이 울창하고 잔디가 푸르러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짙다. 능묘는 가림벽과 난간문, 묘지로 향하는 길, 침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림벽은 길이 10m, 높이 5m이며, 한가운데 마름모꼴의 석각이 새겨져 있다. 위쪽에는 구슬을 희롱하는 한 쌍의 용이 새겨져 있고, 네 귀퉁이에는 박쥐가 새겨져 있다. 난간문은 너비 12m, 안길이 7m이며, 3칸의 한가운데 '한소열황제지릉(漢昭烈皇帝之陵)'이라고 새겨진 아치형의 묘비가 세워져 있고 그 지붕돌에는 보물을 다투는 한 쌍의 용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한소열황제지릉’(汉昭烈皇帝之陵) 비석은 청나라 건륭 연간에 세워진 것이다.묘비 앞에 꽃도 많이 놓여 있었다.

 

 

 

 

 

 

 

 

 

묘지라고해서 ‘묘가 어디 있지?’하면서 한 바퀴 돌았는데 엄청 큰 무덤이어서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규모로 사진으로 담기지도 않는 사이즈였고 사람이 너무 많아 사진 찍기도 쉽지 않았다.

 

 

 

 

 

 

궐방 뒤편에 유비의 묘가 있다. 유비의 묘 혜릉은 높이 12m, 둘레 180m로 유비와 그의 두 부인감(甘)부인과 오(吳)부인이 같이 묻혀 합장 릉이다.  능을 한바퀴 돌아본다...

 

 

 

 

 

 

 

 

 

 

 

 

 

 

 

 

 

 

 

 

 

 

 

 

 

 

 

 

 

 

 

 

 

 

 

 

 

 

 

 

 

 

 

 

 

 

 

 

 

 

 

 

 

 

 

 

 

 

'도원결의(桃園結義) '를 새겨넣은 비석,  삼 형제가 도원결의를 맺었던 복숭아 정원을 재현한 정원도 있다 도원결의를 기념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실제 도원결의 장소가 아니다)....

 

 

 

 

  제갈량전 제갈고(诸葛鼓).

 

 

 

 

 

 

 

유비. 관우. 장비의 의리를 기린 삼의묘

중국 촉나라 유비. 장비. 관우 촉한의 대표적인 삼국지 명장들을 모신 곳 ‘삼의문’으로 가운데 유비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관우 왼쪽에 장비가 있다.

 

 

 

 

삼의묘가 뒤쪽에 있다. 청나라 강희제 시대 쓰촨 제독 정교린이 처음 세웠다.  무장은 도원결의와 같은 의협심과 영웅을 좋아하는 듯하다.  진흙으로 빚은 유비, 관우, 장비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약 3㎞ 떨어진 곳에 위치했는데 1998년 무후사박물관 안으로 옮겨왔다.

 

 

 

 

신성동진(神聖同臻)은 ‘제왕이 고난을 함께 했다’는 뜻이다. 동치제 시대 중건할 때 한 신발회사가 기증했다.  유명인이 아니라 일개 회사라 하니 뜻밖이다.  관우와 장비가 함께 나란하다. 동고동락했는데 유비는 2.8m이고 둘은 2.6m로 만들었다. 아무래도 황제 프리미엄이 붙은 듯하다.  하기야 함께 죽자는 맹세도 지키지 못했는데 말이다.

 

가운데 유비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관우 

 

 

 

 

 

 

 

 

 

 

왼쪽에 장비가 있다.

 

 

 

 

 

 

 

무후사 뒤편에는 유.관.장 삼형제를 기리는 삼의묘가 있다.

유비. 관우. 장비의 무덤인 삼의묘는 1,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이며 주군과 신하가 함께 모셔진 사당은 무후사가 중국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들 석상.

 

 

 

 

 

 

 

 

 

 

 

 

 

중국3세기를 풍미한 유비. 징비. 관우를 비롯하여 촉나라의 여러 명장을 거느린 전설의 전략가 제갈공명, 그 제갈량의 위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사당이다.

 

무후사 입장 마감시간은 오후 5시이다.

 

 

 

 

유비, 관우, 장비 삼 형제를 기리는 삼의묘 내부에는 그들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으며 원래의 삼의묘는 1784년에 화재가 발생해 1787년에 재건축했고 1842년에 한차례의 보수 작업을 거쳤는데 오늘날의 삼의묘 건물은 청나라 도광(道光) 연간인 1843년 때의 것이라고 한다.

 

 

 

 

 

 

 

 

 

 

 

제갈량을 모신 사당 무후사

  

2024.    10.  25.

 

2024.   10.  17 ~  21,   4박  5일 일정으로  라온제나 테마여행 동행 15명이 함께한 중국  쓰촨성(四川省)여행이다. 

 

10월 20일 여행 4일  두번째 여행으로

다른 도시에도 무후사가 많지만 청두의 무후사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임금과 신하가 함께 공양된 사당이고 중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보여주는 삼국 유적박물관으로 삼국성지 (三国圣地)로 인정받고 있는  제갈량을 모신 사당 무후사로 향한다. 

 

 

 

 

 

쓰촨성의 성도인 청두는 삼국시대 촉나라로유비와 제갈량의 사당 ‘무후사’가 유명하다.

 

 

 

 

지금의 무후사는 전형적인 사합원 양식으로 청나라 강희제 때(1672년) 중건된 것이다.   2008년에 국가 1급 박물관으로 지정되면서 규모가 더욱 커져,  15만㎡에 이른다.

 

 

 

청두 무후사는 서진(西晉) 시기인 260년대에 건설되었으며, 유비의 무덤이 있는 곳인 한소열묘(汉昭烈庙)와 맞닿아 있었는데 명나라 초반에 한소열 묘와 하나로 합쳐졌다고 한다. 현재의 무후사 건물은 1672년 청나라 때 재 조성된 건물이다.

무후사의 주요 건물은 모두 남북향의 중심선상에 위치해 있는데, 남쪽으로부터 대문과 이문(二门)을 거쳐 한소열묘, 무후사 건물이 있고 무후사의 뒤에는 삼의묘(三义庙)와 결의루(结义楼) 등 건물이 있다.

 

 

 

 

중국  쓰촨성 청두시 무호사 (武侯祠)에 있는 촉한의 초대 황제인  소열황제 유비 (昭烈皇帝 劉備)의 능묘(陵墓). 유비의 묘는 혜릉(惠陵)이라고 불린다. 이곳은 유비의 능묘이지만 동시에 그의 신하인제갈량(諸葛亮)의 사당(무후사)이기도 하며 유비 외에도  관우.  장비  등 그와 생사고락을 같이한 촉한의 신하들 역시 같이 기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두보의 고백행이라는 시에도 나오듯이 이미 당나라 이전시기부터 유비의 묘와 제갈량은 같은 사당에 모셔져 있었던 것 같다.

 

 

 

 

안내도

 

 

 

 

다른 도시에도 무후사가 많지만 청두의 무후사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임금과 신하가 함께 공양된 사당이고 중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보여주는 삼국 유적박물관으로 삼국성지 (三国圣地)로 인정받고 있다.

 

면양에 세워진 무후사는 촉한 당대에 지어졌지만 성도의 무후사는 성한의  이웅이 촉한이 망한 지 50여 년 만에 무후사를 만들고, 지금의 장소에 옮겼다. 이민족 정권인 성한 정권 입장에선 사천 주민들의 추앙을 받는 제갈량의 위상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5세기 이후에는 유비와 제갈량 두 사람이 각각 명군과 충신의 본보기로 합사된 것이 확인되고, 적어도 명나라 홍무제의 아들 촉헌왕 주춘이 제사를 지낸 것이 확인되니 그 연원이 오래되었다.

이후에도 두보를 비롯한 많은 명사들이 이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현재 남은 옛날 건축물 상당수는 명나라 말에 난리 때 불에 타 청나라 강희제 때 재조성된 것이고, 성도 무후사 박물관으로 1961년에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문 앞에는 크게 한소열묘라고 적혀있으나, 사람들은 모두 무후사라 불렀다.  '소열은 유비의 시호이다.

 

 

 

 

무후사에 들어서면 사당과 사당을 연결하는 산책로엔 푸른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한소열묘 본전의 중앙에는 3m 높이의 유비 조각상이 서 있으며 동쪽 별채에는 관우 부자의 조각상과 부하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으며 서쪽 별채에는 장비와 자손들의 조각상이 있다.    북쪽에 위치한 본당을 중심으로 남쪽을 향해 하나의 축을 이루는 구조다.

 

 

 

 

중국에서 유일하게 주군과 신하가 함께 모셔진 사당으로, 소설 ‘삼국지’ 마니아에게는 성지로 통한다.   원래 이곳은 223년에 사망한 유비의 묘로, 정문에는 유비의 시호인 한소열제(漢昭烈帝)를 따서 ‘한소열묘(漢昭烈庙)’라고 적힌 편액이 걸려 있다.   하지만 보통은 ‘한소열묘’ 대신에 ‘무후사’라고 부르는데, 이는 무향후(武鄕候) 제갈량을 모신 사당이란 뜻이다.   주군인 유비를 제치고 제갈공명의 사당으로 더 알려져 있는 것으로 볼 때 쓰촨에서는 제갈공명의 인기가 유비보다 더 높은 듯하다.

 

 

 

 

삼절비(三绝碑)

제갈량의 공덕을 칭송하는 비석으로 정식 명칭은 촉한승상제갈무후사당비(蜀漢承相諸葛武候祠堂碑)’이다. 809년 당나라 때 헌종(憲宗)이 세운 이 비석은 문장, 서예, 석각 모두 당대 최고의 명인이 참여하여 완성한 것으로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장시철이 문장을, 고등이 비석을 세웠다.

 

 

 

 

대문을 들어서니 양쪽으로 정자가 세워져 있다당나라와 명나라 비석을 보존하고 있다복판 길을 따라가면 이문(二門)이 나온다.

 

청두 무후사 한소열묘 이문의 '명량천고' 편액은 ‘밝은 군주(유비)와 어진 신화(재갈량)가 천고의 역사를 넘어 흘러 전해진다’는 뜻으로 영원히 오랫동안 빛나는 인물이라는 ‘명량천고(眀良千古)’가 걸렸다. 청나라 강희제 시대 쓰촨 제독으로 부임한 오영의 필체다.

 

 

자세히 보면 해와 달이 있는 명(明)이 아니라 눈(目)과 달이 붙었다. 명나라 국호를 쓰지 않으려 했다고 흔히 말한다. 강희자 전에도 나오는 이체자다. 유비가 숨을 거둔 펑제(奉節)의 백제묘 명량전에도 똑같은 글자가 있다. 비슷한 시기의 쓰촨 총독 채육영의 필체다. 당시 밝을 명에는 눈도 달렸던 듯하다.

 

 

 

 

 

 

 

 

 

 

과청(过厅)에는 삼국지와 연관된 자료들이 전시되고 있는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이다. 위나라 정벌을 결심한 제갈량이 촉한의 2대 황제 유선에게 바친 글로, 이곳에 전시된 출사표의 초서 필체는 명나라 때 청두의 문인 백린(白麟)이 쓴 것이다. 한때 악비(岳飛)의 친필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는데, 이는 백린이 술에 취해 글을 쓰다가 자신의 이름이 아닌 악비의 이름을 적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출사표(서기 181~234년)를 던지고 북벌을 떠났던 개갈량의 마으이 얼마나 비장했을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또 다른 설은

제갈량이 위를 정복하려고 출정할 때 유비의 아들 유선에게 써서 올린 글 출사표를 송나라의 충신 악비(岳飛)가 송 고종 소흥 8년(1138)에 옮겨 쓴 글이라는 설이 있는 후 출사표...

이것은 촉한의 명신 제갈량과 송대의 충신 악비의 정신이 결합된 것으로 서예적, 문학적 가치는 물론 충절의 귀감이 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높이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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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의 장수이자 송대의 대표적인 서예가로 손꼽히는 악비(서기 1103~1142년)는 금나라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진회의 농간으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서른일곱의 나이로 처형되고 마는데 악비가 제갈공명(서기 181~234년)의 출사표를 썼는데 그것이 천하의 명필이다.

 

 

 

 

무후사 정문에 들어가 "무후사(武侯祠)"라는 편액이 걸린 문을 들어서면, 앞에 있는 전당(殿堂)의 복도가 문신무장랑(文臣武將廊)이다.

이문을 넘어서면 양쪽에 긴 복도 왼쪽에 무장이 도열해 있다. 삼국지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이다. 조운을 필두로 요화와 황충을 비롯해 무장이 14명이다. 모두 28명이 전투라도 벌일 기세로 앉아 있다.

 

 

 

 

 

 

 

 무장 복도의 요화와 황충

 

 

 

 

 

 

 

 



 

 

 

 

 

이문을 넘어서면 양쪽에 긴 복도가 있다. 오른쪽에 문신들로 수장인 방통과 함께 앉은 간옹을 비롯해 문신이 14명으로 청나라 시대 무대극 복장으로 치장하고 있는데 치적을 기록한 비석이 하나씩 놓였다.

 

 

 

 

 문신 복도의 방통과 간옹

 

 

 

 

 

 

 

 

 

 

 

 

 

 

 

 

 

 

 

관우, 장비 등의 문·무관 28인의 상은 옆 동(棟)에 있고 벽에는 그들의 문장과 업적을 기리는 액자와 연(聯)이 전시되어 있다.

 

 

 

 

좌우로 촉한(蜀漢)시대 유명한 문관(文官)과 무장(武将)들의 흙으로 빚은 상이 자리잡고 있다. 한소열사당 내부에는 촉한의 역사적 인물들을 상징하는 토우가 41점에 달한다.   토우들은 청대(淸代)의 조각가들이 만들었으며 촉한의 군신서열에 따라 배치돼 있다.   사당 왼쪽에는 무신, 오른쪽이 문신들이다.

 

 

 

 

 

 

 

 

 

 

유비전(刘备殿)은 ‘소열사(昭烈司)’라고도 한다. 이문(二门)을 통과하면 사당 정중앙에 황금으로 치장된 유비의 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 편전에는 관우 부자와 주창(周仓)의 상이 있고, 서쪽 편전에는 장비와 그 아들, 손자의 상이 있다.   또한 양쪽으로 이어진 복도 중에서 동쪽 복도에는 촉한의 문신들, 서쪽에는 무장들의 상이 늘어서 있어 흥미롭다.

 

 

 

 

성관금석(정성을 쏟으면 쇠와 돌도 뚫는다)이라 쓰인 현판이 모셔져 있다.

 

 

 

 

왼쪽의 장비

 

 

 

 

서쪽 편전에는 장비와

 

 

 

 

 

그 아들 장포와 손자의 상이 함께 모셔져 있다.

 

 

 

 

 

 

 

유비전 벽에는 공명의 정치· 군사상의 전략 사항으로 유명한 융중대(隆中對)의 액자가 걸려있다.

 

 

 

 

유비전,  사당 정중앙에 황금으로 치장된 유비의 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청두는 쓰촨성의 성도이자 유비가 세운 촉나라의 수도였다.

 

 

 

 

전신을 도금으로 꾸몄으며 9줄 면류관을 쓰고 있다.   양손으로 다소곳하게 제례에 사용하는 옥기인 규장(珪璋)을 들고 있다.   자세히 보니 북두칠성을 새겼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양쪽 시위가 황제의 상징인 전국옥새(傳國玉璽)와 상방보검(尚方寶劍)을 들고 있다. 대낮인데도 깜깜하니 조명을 받은 유비만 돋보인다.

 

 

 

 

유비의 손자 유심 상

촉한이 망할 때 끝까지 항전을 주장한 유비의 손자 유심의 상은 할아버지 유비 옆에 그대로 세워져 있지만 유비의 아들 유선 상이 없는 이유는 유선 제위시 싸움을 하지 않고 그대로 항복하여 나라를 말아먹은 어리석은 군주라고 하여 남송때 없애버렸다. 유선의 자손은 영가의 난 당시 대가 끊겼다.

 

 

 

 

한소열묘 전각 앞에는 ‘업소고광’ 편액이 걸려있다.   ‘한나라를 창업한 고조 유방의 제업을 이어 받았다’는 뜻으로 후한의 정통성을 보여준다. 

 

 

 

 

 

 

 

관우의 상

 

 

 

 

 

 

 

동쪽 편전에는 관우 부자와 주창(周仓)의 상이 있다.

 

 

 

 

 

 

 

 

 

 

 

 

 

 

 

 

 

촉의 1대 황제 유비 사당의 상,  안으로 더 들어가면 한소열묘 대전이다.   3m 높이의 유비가 앉아있다.   

 

 

 

 

 

 

 

 

한소열묘 전각 앞에  '대업을 크게 발전시켰다'는  ‘업소고광’ 편액이 걸려있다. 

 

 

 

 

제갈량의 무후사가 정전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 유비보다 제갈량을 숭배하는 경향이 강하다.

 

 

 

 

한소열묘와 제갈량 사당 사이에 과청(過廳)이 있다. 뚫린 건물이라는 뜻이지만 무후사 대문이다. 편액은 문학가인 궈모뤄가 썼다. 유적지에 남긴 필체가 워낙 많아 한눈에 알기 쉽다.

오른쪽 기둥에 적힌 글자가 익숙하다. '촉상'에 나오는 삼고빈번천하계(三顧頻煩天下計)다. 중국 공산당이 결성된 1921년 1차 전국 대표로 유명한 둥비우가 썼다. 왼쪽 기둥에 일번오대고금정(一番晤對古今情)이라는 소회를 이었다. ‘한번 대면해 고금의 회포를 풀리라’라는 소망이다. 부주석까지 오른 당 원로이니 기둥 한자리를 차지할 만하다.

 

‘무후사(武候祠)’라고 적힌 현판에 주목하자.   중국의 저명한 극작가이자 사학자였던 궈모뤄(郭沫若)의 필체다. 

 

 

 

 

무후사(武候祠)의 정식 명칭은 유비의 사당을 뜻하는 한소열묘이다. 촉나라 한소열은 소열황제 유비를 뜻한다고...

 

 

 

 

무후사 본전 제갈량전 사당에 적혀있는 ‘명수우주’

현판에 새겨진 명수우주는 '이름이 온 천하에 울린다.'라는 뜻으로 당나라 시인 두보가 무후사에 들러 제갈량을 기리며 쓴 시의 한 구절이다.

 

 

 

 

 

 

 

 

 

 

무후사 정원당 앞의 향로를 잡고 있는 병사 석상, 역사 인물을 보다가 사병의 수더분한 인상을 마주하니 편안해지는 기분이다.   그냥 친구 같은 느낌이다.

 

 

 

 

제갈량을 봉공하는 전각 앞에 이른다.   향로를 붙잡고 있는 조각상이 보인다.

 

 

 

 

 제갈량 사당인 무후사 정원당 제갈량전

5칸 크기인 본전은 정원당(靜遠堂)이다. 제갈량이 아들에게 남긴 계자서(誡子書)가 출처다.   마음이 깨끗해야 뜻을 세울 수 있고 마음이 편안해야 포부를 이룰 수 있다는 ‘담박명지(澹泊明志)  영정치원(寧靜致遠)’에서 따왔다.

 

 

 

 

 

불감 안에 앉은 제갈량은 청나라 강희제 시대인 1672년에 제작됐다.   깃털 우산을 들고 두건을 두르고 도포 입은 유학자 모습이다.   시동 둘이 병서와 보검을 들고 있고 벽에는 아들인 제갈첨과 손자 제갈상이 보좌하고 있다.

 

 

 

 

 

 

 

 

 

 

 

 

 

 

 

 

 

 

 

 

 

 

제갈량

사실 유비가 촉을 통치한 기간은 6~7년 가량이지만 제갈량은 촉의 재상으로 10년 넘게 통치하며 존경을 받았던 점이 주된 이유로 보인다. 물론 소설 삼구지연의에서 제갈량이 거의 진주인 공급으로 각색된 점도 이런 숭배의 원인 중 하나일 듯 ~

 

 

 

 

제갈량전 구리 북  제갈고(诸葛鼓)는 공명이 남쪽을 정벌하면서 만든 것으로 낮에는 그것으로 밥을 짓고 밤에는 경보를 발했다고 한다.

 ‘제갈고(诸葛鼓)’라고 불리는 이 북은 원래 남방 소수 민족의 악기인데, 당시 쓰촨 지방에서 민족 간의 문화 교류가 있었음을 알려 주는 사료로서 각별한 의미가 있다.

 

 

 

 

 제갈량 손자 재갈상 상이 모셔져 있다.

 

 

 

 

 

 

 

 

 

 

  '삼고초려'를 나타낸 조각상들입니다. 삼국시대에 유비가 제갈량을 얻기 위해 직접 제갈량의 초가집으로 세 번이나 찾아갔던 일화이다.

 

 

 

한소열 사당을 나와 유비가 잠들어 있는 혜릉이 있는 곳으로 가는 곳에 연밭 연지가 있다.

 

 

 

 

 

 

 

연밭을 지나면 혜릉 입구이다.

 

 

 

 

 

 

 

계하루

 

 

 

 

 

 

 

 

 

 

 

 

 

 

붉은 담장과 대나무가 어울리는 길이 참 좋다.

 

 

 

 

网红墙

 

 

 

 

혜릉으로 이어지는 100m 가량의 길은 무후사의 포토스팟으로 유명하다. 유려한 곡선의 적갈색 벽 위에 드러난 푸른 대나무 숲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청두 최고의 인생사진을 남겨볼 수 있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다.

 

 

 

 

 

 

 

혜릉과 무후사를 이어주는 붉은 담벼락의 좁은 길이 있는데, 여기가 바로 무후사 최고의 포토 존이라고 하니 사진을 남기는 것도 잊지 말자.

 

 

 

 

 

 

 

 

유비의 묘인 혜릉 입구

 

 

 

 

 

 

 

 

'천년이 지나도 오히려 늠름하다'는 '천추늠연'   현판은 청나라 광사제(1875~1908) 갑진년(1904) 12월에 썼다.

 

 

 

 

 혜릉  유비묘(刘备墓)

청두 무후사가 다른 무후사와 다른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유비의 묘인 혜릉이 있는 것이다.   삼국인 유비. 조조. 손권 중 지금까지 무덤이 남아 있는 건 유비가 유일하다.  이 능묘는 제갈량이 유비를 위해 직접 선택한 자리라고 한다.

 

 

 

 

유비의 혜릉

원추형의 능묘는 높이 12m, 둘레 180m로 작은 구렁처럼 보이고, 수목이 울창하고 잔디가 푸르러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짙다. 능묘는 가림벽과 난간문, 묘지로 향하는 길, 침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림벽은 길이 10m, 높이 5m이며, 한가운데 마름모꼴의 석각이 새겨져 있다.  위쪽에는 구슬을 희롱하는 한 쌍의 용이 새겨져 있고, 네 귀퉁이에는 박쥐가 새겨져 있다.  난간문은 너비 12m, 안길이 7m이며, 3칸의 한가운데 '한소열황제지릉(漢昭烈皇帝之陵)'이라고 새겨진 아치형의 묘비가 세워져 있고 그 지붕돌에는 보물을 다투는 한 쌍의 용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한소열황제지릉’(汉昭烈皇帝之陵) 비석은 청나라 건륭 연간에 세워진 것이다.  묘비 앞에 꽃도 많이 놓여 있었다.

 

 

 

 

 

 

 

 

 

묘지라고해서 묘가 어디 있지?’  하면서 한 바퀴 돌았는데 엄청 큰 무덤이어서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규모로 사진으로 담기지도 않는 사이즈였고 사람이 너무 많아 사진 찍기도 쉽지 않았다.

 

 

 

 

무덤 위에 무성하게 가지를 뻗은 나무들이 인상적이다.   유비의 능으로 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이 우리나라의 능과 다른데 그 이유는 도굴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유비는 관우의 복수를 위하여 70만 대군을 이끌고 오나라로 쳐들어 갔으나 패퇴하여 백제성에서 죽음에 이르며, 백제성에 묻어 달라고 했으나 성도로 옮겼다고 한다.

 

 

 

 

능을 한바퀴 돌아본다.

 

 

 

유비의 무덤 혜릉을 걸으며 유비의 마지막을 떠올려 본다.

 

 

 

 

유비의 무덤은 유비묘(劉備墓)라고도 하며, 청두 무후사의 정전 서쪽에 있다.   223년, 유비가 백제성에서 붕어한 뒤 제갈량은 유비의 시신을 5월에 청두로 옮기고 8월에 혜릉에 매장하였다.   2대 황제이자 아들인 회제 유선은 제갈량의 건의에 따라 유비의 부인이자 자신의 어머니 소열황후 감부인을 합장했고 후일 후비인 목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의 유골도 합장하였다.

 

 

 

 

유비의 황릉은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 황제가 직접 능을 보수하고 비석까지 세우는 등 극진하게 대우하였다.   것은 여러 곳에서 자기네 땅에 유비묘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유비의 묘가 성도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주장은 역사적 근거가 부실하며 다른 곳에 이장됐다는 정식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송나라 초 지리서인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권72에 따르면 그의 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익주 성도현에 있어 동릉(東陵)이라고 하니, 바로 유비의 능이라 하였고 사당이 있어, 동릉신(東陵神)이라 했다.

 

 

 

 

현재 유비의 60대( ? ) 후손이 여기서짚신을 팔며 생활하고 있다.

 짚신을 만들어 파는 건 관광객들을 위한 마케팅이라는 말도 존재한다.  능  능 관리자 설이 사실이면 유비의 후손이 선조의 무덤을 지키고 있다는 의미다.   선조가 유비의 둘째 아들 유영이라고 한다.   항렬로 따지면 전한 경제의 78대손, 중산정왕 유승의 77대 후손이며 유정의 76대손이 된다.

 

 

 

 

유비가 묻힌 무덤은 정말 거대하다. 묘를 한 바퀴 돌아 나온다.

 

 

 

 

 

 

 

혜릉에서 나오면 붉은 담벼락 위로 대나무가 무성한 곳을 다시 지난다.   대나무 숲이 이색적인 곳으로 영화에 나온 곳이다...

 

 

 

 

 

 

 

바람에 대나무가 흔들리는 소리가 너무 평화롭고 좋다.

 

 

 

 

 

 

 

 

 

 

 

 

 

 

 

 

 

 

 

 

 

 

 

 

 

 

 

 

'도원결의(桃園結義) '를 새겨넣은 비석,  삼 형제가 도원결의를 맺었던 복숭아 정원을 재현한 정원도 있다 도원결의를 기념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실제 도원결의 장소가 아니다)....

 

 

 

 

 제갈고(诸葛鼓)

 

 

 

 

 

 

 

유비. 관우. 장비의 의리를 기린 삼의묘

중국 촉나라 유비. 장비. 관우 촉한의 대표적인 삼국지 명장들을 모신 곳 ‘삼의문’으로 가운데 유비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관우 왼쪽에 장비가 있다.

 

 

 

 

삼의묘가 뒤쪽에 있다. 청나라 강희제 시대 쓰촨 제독 정교린이 처음 세웠다.  무장은 도원결의와 같은 의협심과 영웅을 좋아하는 듯하다.  진흙으로 빚은 유비, 관우, 장비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약 3㎞ 떨어진 곳에 위치했는데 1998년 무후사박물관 안으로 옮겨왔다.

 

 

 

 

신성동진(神聖同臻)은 ‘제왕이 고난을 함께 했다’는 뜻이다. 동치제 시대 중건할 때 한 신발회사가 기증했다.  유명인이 아니라 일개 회사라 하니 뜻밖이다.  관우와 장비가 함께 나란하다. 동고동락했는데 유비는 2.8m이고 둘은 2.6m로 만들었다. 아무래도 황제 프리미엄이 붙은 듯하다.  하기야 함께 죽자는 맹세도 지키지 못했는데 말이다.

 

가운데 유비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관우 

 

 

 

 

 

 

 

 

 

 

왼쪽에 장비가 있다.

 

 

 

 

 

 

 

무후사 뒤편에는 유.관.장 삼형제를 기리는 삼의묘가 있다.

유비. 관우. 장비의 무덤인 삼의묘는 1,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이며 주군과 신하가 함께 모셔진 사당은 무후사가 중국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삼의묘 안으로 들어가 보면 이런곳이 나온다...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들 석상

 

 

 

 

무후사에서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아 이곳을 더 보고 싶었는데 많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중국3세기를 풍미한 유비. 징비. 관우를 비롯하여 촉나라의 여러 명장을 거느린 전설의 전략가 제갈공명, 그 제갈량의 위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사당이다.

 

무후사 입장 마감시간은 오후 5시이다.

 

 

 

 

유비, 관우, 장비 삼 형제를 기리는 삼의묘 내부에는 그들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으며 원래의 삼의묘는 1784년에 화재가 발생해 1787년에 재건축했고 1842년에 한차례의 보수 작업을 거쳤는데 오늘날의 삼의묘 건물은 청나라 도광(道光) 연간인 1843년 때의 것이라고 한다.

 

 

 

 

삼국지의 역사 속 인물들을 한곳에서 느껴본다. 이곳을 끝으로 쓰촨성의 성도인 청두는 삼국시대 촉나라로, 유비와 제갈량의 사당 ‘무후사’구경을 마치고

 

 

 

 

무후사와 맞붙은 삼국시대를 재현했다고 하는 금리거리 관광을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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