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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신지도 항일운동 기념탑(전남 완도군 신지면)

꽃돼지. 2024. 10. 5. 20:26

완도  신지도 항일운동 기념탑

 

2024.   10.    5. 

 

 

2024.  10.   1 ~ 2 (1박  2일) ,  포항농협 농가주부 동 회장 13명과 함께한  완도여행으로

 

1일 여행은

포항에서 6시 출발하여  해남과 완도를 이어주는 완도대교를 지나 완도 빙그레 본점 식당에서 생선구이로 점심 식사 후 장보고 기념관 & 청해진 유적지,  완도 수목원,  정도리 구계동,  완도타워을 둘러보고  완도회타운 해양치유 밥상으로 저녁 식사 후  완도와 신지도를 이어주는 신지대교를 지나 완도 신지도 루미아호텔 & 리조트에서  1박을 하고

 

2일 여행은

완도 신지도 루미아호텔 & 리조트에서 전복죽으로 아침 식사 후   신지도 항일운동 기념탑,  신지도 명사십리 해변 맨발걷기,  신지도와 고금도를 이어주는 장보고 대교를 지나 고금도에 들어와 이순신 기념관 &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지(충무사),  고금도와 약산도를 이어주는 약산대교를 건너 약산해안 치유의 숲에서 숲길도 걸어 보고,  고금 휴게소를 지나 고금도와 강진을 잇는 고금대교를 지나 강진으로 들어와서 강진 사찰음식 전문점 도반에서 정진코스로 점심 식사 후 인근의 카페 목리에서 차 한잔 후 다시 먼길을 달려  포항으로 들어오는 완도 일주 여행길로  

 

가족.지인들과  함께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아름다운 도시,  가고 싶은 섬 완도군 신지도에 위치하고 있는 루미아호텔 &리조트를 출발하며 2일째 여행을 시작한다...

 

2일째 여행 첫번째는 일제 강점기에는 소안도와 함께 항일운동의 불길이 거센 곳이다.

암울했던 일제 치하에서 국권회복을 위해 치열하게 살다가신 신지변 출신 애국지사들의 공적을 기리고 3.1운동 당시 신지학교 학생들의 항일구국운동 정신을 널리 알려 자라나는 세대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세운 신지도의 자랑 항일운동기념탑으로 향해본다...

 

 

 

 

 

신지 항일운동 기념공원은 2010년도에 준공되었으며, 총 1만 4282㎥ 부지에 기념관, 산책로, 체육공원 등을 갖추고 있어 다양한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신지도는 유배의 섬이었다.

조선시대 많은 섬들이 그랬듯이 신지도 또한 유배지로 이용됐다.  섬이 곧 감옥이었다.

신지도에는 갑술옥사, 신유사옥 등 정치적 이유로 유배된 이들이 가장 많았지만 더러 살인자나 도적이 유배되기도 했다.

조선은 종주국으로 섬겼던 명나라의 법전인 ‘대명률’에 근거해서 유배를 실시했는데 가장 원거리 유배가 3000리 유배형이었다.  하지만 땅이 좁아 3000리 유배를 실시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생긴 꼼수가 생겼다.  한반도를 한 바퀴 돌게 해 3000리를 채운 뒤 유배를 시키기도 했고, 섬으로 유배를 보낼 때는 거리를 더 쳐주는 편법을 고안해 내기도 했다. 

섬의 거리에 따라 1000리,  2000리, 3000리로 쳐주었는데 신지도의 경우 3000리 유배지였으니 중죄인들의 유배지였다.

‘조선왕조실록’ 등의 관찬 서류를 통해 확인된 신지도 유배자는 38명, 개인 기록 2명을 포함하면 총 40명이다.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와 이세보의 ‘신도일록(薪島日錄)’ 등 개인 기록을 통해 확인된 유배자는 관찬보다 5명이 더 많은 45명이다.

 

 

 

 

신지도 유배객으로 유명한 이들은 조선 후기의 문신 목내선(睦來善), 동국진체의 완성자인 원교 이광사(李匡師), 시조 시인 이세보(李世輔), 조선 후기 천연두 예방법인 종두법을 전파한 문신이자 개화사상가, 한글학자였던 지석영 등이 있다.

이제 대부분의 유배객들 흔적은 간 곳 없고 이광사가 지내던 가옥 정도만 남았다.  이광사는 해남 대흥사의 대웅보전 현판 글씨를 썼다. 그런데 이 현판은 한 차례 떼어 내졌다가 다시 걸린 사연으로 유명하다. 제주 유배 길에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이 현판을 보고 못마땅해서 초의 선사에게 일갈했다.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것이 원교인데 어떻게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걸어놓을 수 있는가.” 하지만 9년 뒤 유배가 풀려 다시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옛날 내가 귀양길에 떼어내라고 했던 원교의 현판을 다시 달아 달라”고 했다. 9년의 유배 살이가 추사를 더 겸손하게 만든 것일까.   추사는 집으로 돌아갔지만 원교는 끝내 유배지인 신지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신지도에는 남해안 최고의 명사십리해수욕장이 있다.   또한 조선 시대 서예가로 유명한 원교 이광사와 '자산어보'의 저자 정약전 등 40여 명의 유배지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에는 소안도와 함께 항일운동의 불길이 거센 곳이다.

 

 

 

 

 

 

 

 

 

 

 

 

 

암울했던 일제 치하에서 국권회복을 위해 치열하게 살다가신 신지변 출신 애국지사들의 공적을 기리고 3.1운동 당시 신지학교 학생들의 항일구국운동 정신을 널리 알려 자라나는 세대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세웠다.

 

공원 내에 우뚝 솟아있는 항일운동 기념탑은 공원 어느 곳에서도 바라볼 수 있는데 탑의 높이가 무려 10m, 좌우 길이 14.7m, 전후 길이 6.3m의 기념탑은 1994년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추어 제막식을 열었다고 한다.

기념탑은 창공으로 힘차게 솟구치는 항일 독립투사들의 드높은 기개를 상징하는 탑신과 항일 독립투사들의 독립운동에 호응하여 전국에서 일어나는 운동을 상징하는 양측 날개로 구성되어 있다.

 

 

 

 

 

 

 

 

 

 

 

 

 

 

 

 

 

 

기녑탑 주변으로는 추모시를 비롯해 신지도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임재갑 선생님의 공적을 볼 수 있고 기념탑 건립에 협력했던 동아일보사의 '바치는 글' 등 다양한 내용의 글을 만나볼 수 있다.

 

 

 

 

 

 

 

명사십리해수욕장 동쪽 끝 울몰에서 가까운 거리에 신지도의 자랑인 항일운동기념탑이 있다.   신지도는 소안도와 함께 일제 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의 성지로 불린다.   신지도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는 임재갑(1891~1960), 장석천(1903~1935) 선생 등이 있다.

 

 

 

 

소안도나 신지도, 완도의 항일운동은 해방된 조국에서도 훈장이 아니라 족쇄였다.   서러운 세월을 살아온 신지도 독립운동가들이 복권된 것은 1990년대 들어서다.   참으로 안타깝고 서러운 세월이었다.   1994년에 대곡리에 신지항일운동기념탑이, 2010년에는 신지항일운동기념공원이 조성됐다.  이제야 비로소 역사가 바로잡혀 가고 있다.   하지만 갈 길은 여전히 멀다.   독립운동가의 후예들은 여전히 외롭고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세월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지면 소재지에서 제법 높은 곳에 위치하여 전망이 좋다. 펄럭 거리는 태극기 소리가 청각을 즐겁게 해준다.

 

 

 

 

2010년에는 신지 항일운동 기념공원이 조성됐다

신지 항일운동 기념공원에는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장석천, 임재갑 선생 등의 다양한 기록물들과 함께 흉상 등이 전시되어 있으니 천천히 전시를 둘러보며 묵념의 시간을 가져보면 좋다.

 

 

 

 

 

 

 

 

 

 

 

 

 

 

 

 

 

 

 

 

 

 

 

 

 

신지 항일운동 기념공원은 2010년도에 준공되었으며, 총 1만 4282㎥ 부지에 기념관, 산책로, 체육공원 등을 갖추고 있어 다양한 모습을 만나볼 수 있는 곳이다.

 

 

 

 

 

 

 

 

 

 

암울했던 일제 치하에서 국권회복을 위해 치열하게 살다가신 신지변 출신 애국지사들의 공적을 기리고 3.1운동 당시 신지학교 학생들의 항일구국운동 정신을 널리 알려 자라나는 세대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세운 신지도의 자랑 항일운동기념탑을 나와  여행 2일째  두번째 여행지인 신지도 명사십리해수욕장으로 향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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