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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남도진성(전남 진도군 임회면 남도길 8-8)
꽃돼지.
2024. 7. 19. 10:09
진도 남도진성 (국가지정 사적 제127호)
2024. 7. 19.
2024. 7. 11 ~ 14 (3박 4일). 가족여행으로 함께한 진도 여행길이다...
3박 4일 일정으로 진도 쏠비치 리조트에서 편히 쉬며 진도를 둘러 볼 계획이다.
2024. 7. 12. 진도여행 둘째 날 ~
쏠비치 호텔 & 리조트 진도를 출발해서 오늘은 고려 삼별초의 배중손(裵仲孫)장군이 용장성을 쌓을 때 조성한 것으로 전해 오는 삼존불이 모셔진 용장사와 삼별초 옛 궁궐터 용장성, 쌍계사와 쌍계사 상수림, 전통남화의 성지 운림산방, 고려 후기 삼벌초를 이끌고 대몽항쟁에 나선 왕온의 묘, 진짜 옛날에 와 있는 듯한 거친 성곽 진도 남도진성, 윤고산 사당 등 진도의 여행지를 둘러보기로 한다....
2024. 7. 12. 진도여행 둘째 날
고려 후기 삼별초를 이끌고 대몽항쟁에 나섰던 왕온의 묘를 나서 이제 네번째 여행지 아주 오래된 성이고 진짜 옛날에 와 있는 듯한 거친 성곽 진도 남도진성으로 향해본다....
서문 성벽 앞에 있는 진도 남도진성 안내도이다.
서문 입구에는 관광 안내소가 있고
그 옆으로는 원래 성안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긴 남도석성 만호비가 자리한다. 만호는 수군(水軍) 진(鎭)의 수장, 6명 뛰어난 수군 만호를 기념하는 비(碑)이다.
서문을 통해서 성안으로 들어선다.
서문에 들어서면 나무가 성벽을 붙잡고 자라고 있다.
서문 양옆에 밖으로 튀어나온 치가 남아있다.
진도 남도진성 안내도
군기고 터
군관청 터
복원한 관아와 내아, 객사 앞에서 본 남문 방향
진짜 옛날에 와 있는 듯한 거친 성곽 ‘진도 남도진성’ 남문
진도는 땅이 기름지고 농사가 번창해서 옥주라고도 부른다.
‘한 해 농사지어 삼 년을 먹는다’라는 말이 아직까지 내려올 정도로 물산과 인심이 넉넉한 고장이다. 진도는 예향이면서 워낙 외진 곳이기에 유배지로도 활용되었고, 군사적 요충지라서 군사 관련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남도진성 남문 풍경으로 좌측이 남문의 치
성문을 공격하거나 부수는 적을 측면이나 후방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중요한 역할을 하는 남문 성문 앞의 옹성으로 U 형태는 활을 쏘기 위한 공간이다.
남문에서 본 치
치에서 본 성의 동쪽
성의 서쪽
ㅁ형태는 성벽에서 총구를 겨룰 수 있도록 한 공간이다.
진도 남도진성은 아주 오래된 성이다.
남도진성은 백제 시대 매구리 현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여겨지는데, 이곳에 성이 구축된 것은 고려 원종 때였다.
당시 몽골에 저항하던 삼별초가 진도까지 밀려와 이곳에 성을 쌓고 몽골과 싸웠다. 그러나 또 다시 상황이 나빠지자 이곳에서 배를 띄워 제주도로 이동했다고 한다.
또한 고려 충정왕 때인 1350년 무렵에는 왜구들의 침탈이 극에 달해 관청과 백성들이 진도를 떠나 육지로 이전하기도 했었는데, 1438년(조선 세종 20년) 쯤 이곳에 남지도포에 해안지역 군사시설인 만호부를 파견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그 뒤에 쌓은 것으로 추정며 그때부터 다시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남도진성은 조선시대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수군과 종4품 만호(萬戶)를 배치하여 조도해협과 신안 하의도 해역 등을 관할하였다.
지금 볼 수 있는 성과 건축물들은 당시 새로 지은 것들을 기본으로 복원한 것들이다. 현재 관아와 내아, 객사를 복원하였으며 앞으로 선소(船所)와 활터를 복원할 계획이다.
남도 진성남도의 규모는 높이 4 ~ 6m로 8척, 폭은 2.5∼3m가량 되는 성으로 둘레가 610m로 1.233척이다. 둥그런 성벽과 동문, 서문, 남문이 거의 그대로 있으며, 서문 양옆에 밖으로 튀어나온 치가 남아있다.
성을 둘러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성 밖 땅을 파 물을 채운 해자였던 남문 앞으로 흘러가는 가느다란 개울 위에 놓여 있는 두개의 아름다운 무지개다리(홍교)가 놓여 있다. 단운교(길이 4.5m)와 쌍운교(5.5m)다. 선암사의 그것 만큼은 아니지만 단아하고 투박한 모습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두 개 모두 편마암질의 판석을 겹쳐 세워 만든 것으로 규모는 작지만, 전국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특이한 양식이다.
진도에는 화강암이 없다. 그래서 편마암질의 다듬지 않은 납작한 돌과 주변의 흔한 짱돌로 쌓아 만들었다. 다리 위에는 흙을 돋우고 잔디를 심었다. 담쟁이 덩굴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일반적으로 홍교는 쌓기 어렵다. 이곳 홍교는 나무에 돌을 쌓고 다리가 완공되면 받침대 역할을 한 나무를 불로 태워버린다. 흙을 채워 다리를 쌓고 나중에 그 흙을 빼면 다리가 쉽게 무너져 머린다고 한다.
남문 앞 단운교
단운교가 더 나이가 많다.
단운교가 세워진 시기는 1870년 이후로 생각하지만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며 이런 다리가 많았었는데 1970년대 새마을 사업하면서 부숴버리고 시멘트 다리로 만들어 진도에 유일하게 두개가 남아있는 곳이 여기라고 한다.
단운교는 옆에서 보면 무지개 모양을 하고 있으며 개울이 넓어 중간에 다리를 세워 쌍무지개 형식으로 만들었는데 지방에 흔한 돌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이용하여 투박한 면은 있지만 서민적이 멋이 있다.
남문 앞에 있는 단운교와 조금 떨어져 있는 쌍운교는 1930년 즈음에 주민들에 의해서 세워졌다고 전해온다. 이 두 다리는 비록 규모는 작지만 단아하면서도 우아한 게 딱 백제의 미다.
쌍운교 및 단운교는 남도진성 남문 밖을 흐르는 세운천 위에 세운 다리로 진도 남동리 쌍운교 및 단운교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15호로 지정되었다.
진도 남쪽에 위치한 남도진성은 왜적의 방비를 위해 설치하였던 방어기지이다. 삼국시대 때 축성되었는데 고려 때는 삼별초가 이곳을 근거지 삼아 대몽항쟁을 펼쳤다고 하는데 지금 남아 있는 성은 조선 세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기록에 따르면 1214년부터 1259년에 걸쳐 왜구가 연해지방을 침범하여, 1350년(충정왕 2)에는 진도의 관아를 내륙지방으로 옮기고 백성을 옮겨 살게 하였고 조선 세종 때 이르러 비로소 진도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최무선이 활약했던 그 당시 왜구가 얼마나 설쳤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진도가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지역에 있는 만큼 남도진성은 전략적 요충지였고, 그래서 이곳은 조선시대 수군의 기지였다고 한다.
보통 누각이라 하지만 이곳은 군부대 안이라 적의 동정을 살피거나 망을 보는 초소 역할을 하는 곳이라 망루라고 한다.
복원한 관아와 내아, 객사 앞에서 본 남문
서문 앞에서 본 복원한 관아와 내아, 객사
복원한 관아와 내아, 객사
진도 남도진성 북쪽 방향이다...
내아 터
동헌 터
동헌 터에서 바라본 복원한 관아와 내아, 객사
복원한 관아와 내아, 객사로 이동한다.
복원한 관아와 내아 사이로 객사가 보인다.
관아 동헌은 만호가 업무를 보던 건물로 동문과 서문을 잇는 도로의 북쪽 중앙에 위치하고 잇던것을 복원한 것이다.
관아는 현재 남도진성 메다버스 투어 체험존을 오픈하고 있었다...
동헌 마루에 앉아서 바라본 진도 남도진성의 전경이 펼쳐진다...
동헌 마루에서 바라본 서문 성벽과 서문방향
동헌 마루에서 바라본 서문방향
동헌 마루에서 바라본 한창 복구 중인 동문 성벽과 서문방향
동헌 옆을 끼고 바로 앞에 보이는 내아로 들어가 본다...
내아와 동헌의 뒷모습이다.
동헌과 객사. 내아
내아는 조선시대 만호의 가족이 거처하던 살림집으로 동문 안쪽의 북동쪽에 위치하였다고 하는데 이곳에 복원했다.
객사와 내아
내아.객사를 충분히 둘러보고 동헌으로 다시 나와
이제 복원된 건물들도 뒤로하고
서문으로 향한다.
나무가 성벽을 붙잡고 자라고 있는 서문을 나선다.
남도진성은 넓고 거칠었다.
부분적으로 공사하는 곳도 있지만, 문화재라는 게 늘상 수리하고 고치고 복원하는 게 일 아니던가 ?
성곽 안쪽은 그 옛날 마을이나 관청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은 그저 황량한 들판만 남아 있을 뿐이다. 오래 전 남도진성 사람들의 고단했을 삶과 애환을 생각하며 사색하기에 괜찮은 곳이었다.
삼별초, 왜구, 왜란 등을 생각해 보면 전쟁도 침략도 없는 시대에 태어나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저절로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