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자집으로 불리우는 경주교동 최씨고택(중요민속자료 제27호) 과 경주 교동마을
최부자집으로 불리우는 경주교동 최씨고택(중요민속자료 제27호) 과 경주 교동마을
2016. 11. 22.
2016. 11. 16 ~17 (1박 2일) 대학친구들과 경주에서 1박 2일 ~
1박 후 2일째 날이다..
오늘 일정은 보문동 순두부집으로 이동해서 아침 식사후 첨성대, 계림, 경주향교, 경주 최부자집과 교동, 경주 법주 그리고 신라 41대 헌덕왕릉 순으로 여행할 예정이다..
경주 여행 2일째....
계림 옆에 있는 경주향교를 보고 네번째 여행지인 경주 최부자집으로 불리우는 경주교동 최씨고택과 경주 교동마을로 향해 본다..
경주 향교를 나와서 경주향교의 외삼문을 지나 교동마을로 들어간다..
돌 의자가 넘 멋지다...
지체 높은 사람들이 둘러 앉아서 회의를 했을 법한 장소다...
골목안은 지체 높은 대감이 살았던 것 같이 높은 솟을문과 담장이 이채롭다.
다시 높다란 담벼락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간다...
현재 최 부잣집은 영남대학교의 소유로 되어 있다.
경주 교동 최씨고택(중요민속자료 제27호)
중요민속자료 제27호인 경주최씨고택과 중요무형문화재 제86-다호인 경주교동법주가 자리잡고 있는 교촌마을은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9대에 걸쳐 진사(進士)를 배출한 경주 최부자의 얼이 서린 곳이다.
특히 최부자집에서 가훈처럼 내려온 원칙인 “벼슬은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솟을대문과 행랑채
100여명의 식객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었다는 경주 최부자 집의 사랑채.
본래 최 부자집은 99칸의 대저택이었다.1970년에 화재로 소실된 사랑채는 지난 2006년 복원 근래에 새로 지어졌다.
사랑채에 걸려있는 현판
퇴계 선생의 정신을 계승한 대한민국 유필(儒筆)의 품격(品格)이 드러난 용암고택(龍庵古宅)이란 현판글씨는 최진립장군의 14대 종손이며 높은 품위와 忠과 義의 가풍을 잇는 21세기 선비인 충의당(忠義堂) 주인 최채량(崔採亮)의 글씨다. 최채량(崔採亮)의 아호 역시 "어리석은 산" (愚山)이다.
둔차(鈍次)........
최 부잣집의 가훈을 함축적으로 표현하자면 중용(中庸)과 의(義)로움이다.
"치우치지 말고, 성급하지 말고, 욕심 내지 않는다. 어 느 것이든 완벽한 한 가지는 없으며, 좌우에 치우침이 없이 의롭게 산다."
이런 중용의 덕을 뼈에 심기 위한 듯, 마지막 최부자 최준의 조부(祖父) 최만희의 호는 "대우(大愚: 크게 어리석음)"였으며, 친부(親父) 최현식의 호는 둔차(鈍次: 재주가 둔해 으뜸가지 못함)였다.
전진문 교수의 "경주 최 부잣집 300년 富의 비밀" 에 있는 "둔차(鈍次)"의 설명이다.
1등보다는 2등’, ‘어리석은 듯 드러나지 않고 버금감’은 하나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1등주의’가 팽배해 있다. 특히 국경 없는 글로벌 시대에는‘ 세계 1등’만이 시장을 선점하고 우뚝 설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1등이란 그야말로 하나뿐이다. 1등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을 불만 속에서 불행하게 살 수 밖에 없다. 또한 1등을 했더라도 만족은 잠시뿐 바로 그 순간부터 끝없는 도전에 시달리게 된다.
그에 비해 2등은 이러한 것들을 적게 받기에 유복하다. 그러나 2등도 결코 쉽지는 않다. 1등에 버금가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2등을 하라.’는 말은 ‘노력을 적당히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1등이 못되어도 만족하라.’는 의미다. 이것은 최씨 가문에서 추구하는 적정 만족의 원리와 상통한다.
스스로 만족하며 겸양할 때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생기고 함께 사는 정신도 생기는 것이다.
큰 사랑채 뒷편 후원으로 가 본다..
큰 사랑채 뒷편에는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 뒷편 후원에서 바라본 안채의 뒷면이 보인다...
다시 돌아 큰 사랑채의 마당에 선다..
큰 사랑채에는 한말 의병 신돌석 장군, 면암 최익현, 스웨덴 구스타프 국왕(당시는 왕세자), 의친왕 이강공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손님들이 머물렀다 한다..
사랑채의 가장 오른쪽 방
큰 사랑채 옆으로 안채와 곶간도 보인다..
최 부잣집 여성들의 공간인 안채
ㅁ자 형태로 지어진 안채는 원래 8채 99칸 규모였으나 현재는 3채만 남아 있다.
경주 최부자집의 집안을 다스리는 제가齊家의 가훈 '육훈(六訓)'과 자신의 몸을 닦는 수신(修身)의 가훈 '육연(六然)'이 있다.
“서기 1671년 현종 신해년 삼남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경주 최부자 최국선의 집 바깥마당에 큰 솥이 내걸렸다.
주인의 명으로 그 집의 곳간이 헐린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하겠느냐. 모든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라. 그리고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혀주도록 하라.’
큰 솥에선 매일같이 죽을 끓였고, 인근은 물론 멀리서도 굶어 죽을 지경이 된 어려운 이들이 소문을 듣고 서로를 부축하며 최부잣집을 찾아 몰려 들었다. … 흉년이 들면 한해 수천, 수만이 죽어나가는 참화 속에서도 경주 인근에선 주린 자를 먹여 살리는 한 부잣집을 찾아 가면 살길이 있었다. … 그해 이후 이 집에는 가훈 한 가지가 덧붙여진다.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경주를 중심으로 사방 백리라면 동(東)으로 동해 바다를 접하는 감포일대, 서(西)로 영천, 남(南)으로 울산, 북(北)으로는 포항을 포함하는 광대한 면적이다.
이렇듯 최 부잣집은 한 해에 소비되는 쌀의 1/3은 자신들이, 1/3은 과객의 대접에, 나머지1/3은 빈민의 구휼에 힘을 썼다.
최부자 집의 가르침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다.
곳간 앞쪽에서 바라본 안채 모습이다...
800석이 들어간다는 최 부잣집 곳간
보리 고개를 이야기하던 시절 쌀밥 한 번 실컷 먹어보고 죽고 싶다던 시절에 쌀이란 백성들에게 하늘이었다.
'좋은 일을 한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 는 표본인 800석이 들어간다는 최 부잣집 곳간. 이런 곳간이 7채가 있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목재곳간 중 가장 크고 오래되었다고 한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전통 한옥 양식으로 부를 짐작할수 있는 건물이다.
곳간 앞쪽에서 바라본 행랑채의 처마와 큰 사랑채 그리고 안채
곳간 앞쪽에서 바라본 큰 사랑채
행랑채와 출입구인 솟을 대문
솟을 대문 형식을 취했으나 화려하지 않으며 수수하고 평범한 최씨고택 대문으로 일반적인 솟을 대문보다 낮게 지었다는 최씨고택 솟을 대문을 나선다..
경주 최부자집으로 불리우는 경주교동 최씨고택을 나와 경주 최부자집과 담장이 붙어있는 교동법주를 만나러 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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