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분황사에도 가을은 깊어 간다..(경북 경주시 구황동)
경주 분황사에도 가을은 깊어간다.. 2016. 11. 17. 2016. 11. 16 ~17 (1박 2일) 대학친구들과 경주에서 1박 2일 ~ 오늘 첫날 일정은 분황사, 대릉원을 보고 양남 대본리로 이동 후 점심 식사 후 이견대에서 문무왕릉을 바라보고 천천히 석굴암으로 이동, 석굴암을 보고 저녁 식사 후 동궁과 월지 야경 관람 후 컨싱턴 리조트 경주점에서 1박 예정이다. 오늘 첫번째 일정으로 가을을 맞아 본다...
분황사는향기로운 사찰이라하여 이름 붙여진 절집이라고 한다.
넓은 분황사지를 앞마당으로 두고 있는 분황사에도 가을은 깊어간다..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되었으며, 원효와 자장이 거쳐간 절이다. 자장대사는 643년에 당나라에서 대장경의 일부와 불전을 장식하는 물건들을 가지고 귀국하여 분황사에 머물면서 수행 정진을 하였으며 원효대사는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금광명경소>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분황사 창건 당시의 가람배치는 탑을 앞에 두고 법당이 '품(品)'자 모양으로 지어졌는데 신라시대의 1탑 3금당 양식은 이 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30호)
분황사는 선덕여왕때 만든 모전석탑이다. 원효스님이 한때는 기거하던 곳이기도 하다.
모전석탑은 안산암이라는 돌을 벽돌처럼 쌓아 만든 형식이고 가장 오래된 신라의 석탑으로 신라탑 중에서 제일 크고 웅장하며 본래는 9층이었던 것이, 현재는 3층만 남아 있다.
이 탑은 보통 석탑과 달리 탑신 전체가 하나의 전각의 규모가 되어 있고, 탑문이 있어서 사람의 출입이 가능한 것이다.
윗부분이 사라진 분황사 탑을 볼 때 마다 원래의 모습이 궁금해 진다...
모전석탑을 지키는... 감실을 지키고 있는 인왕상.
감실안에는 부처가 조각되어 있고 지금도 살고 계신다.
탑의 문 양쪽으로 서 있는 여덟 개의 인왕상
탑의 문 양쪽으로 서 있는 여덟 개의 인왕상은 선명한 편... 짐작하겠지만 복원된 것들이다. 원형 그대로 모습을 짐작만 할 뿐이다.
분황사 모전석탑을 지키는 사자
긴 세월 모진 비바람 갖은 풍상을 겪고 마모되어 물개처럼 보이는 사자이다..
분황사에는 석탑을 보호하기 위해 동서남북을 지키는 네 마리의 사자가 있다. 두마리는 숫사자 모양인데 두마리는 암사자 모양 같기도 하다.
돌로 깎아 만든 모전 석탑은 천년 세월 외롭게 서 있어도, 국보로 지정되었기에 외롭지 않아 보인다.
담장으로 둘러싸인 작은 절! 절 마당에 들어서면 고즈넉하지만 쓸쓸하지 않은 편안함이 있다.
분황사를 찾아 갔을 때의 첫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쓸쓸한 늦가을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나뭇잎은 물들어가고 국화는 그 향을 가을 바람에 날려 보내고 있다..
분황사 모전석탑 옆에 잇는 비석 받침돌, 분황사 화쟁국사비부(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97호)
고려의 숙종은 모든 논쟁을 화합으로 바꾸려고 시도했던 (화쟁사상) 원효대사에게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하며 그가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함을 애석하게 여겼던 것이다.
명종 대에 이르러서는 원효대사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 하나가 없다는 사실을 안타까워 하며, 분황사에 그의 공덕을 후대에 널리 전하는 화쟁국사비를 세우라 명하기도 한다.
화쟁국사비는 임진왜란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그 옛날에는 비석도 있었겠지?... 지금은 받침돌만 남아서 역사를 전한다. 추사 김정희 선생 글씨가 새겨진 원효비석 받침돌
분황사 석정(경상북도 문화제자료 9호)
모전석탑 뒷쪽에는 호국룡변어정 이라고 불리는 신라시대 설화가 내려오는 우물이 있다.
아직 옛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 무척 신기하며 놀랍기도 했다.
분황사 경내의 우물 석정에는 아직도 물이 마르지 않고 있다.
이 우물 속에서 호국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으며 1965년 우물속에서 14구의 목이 부러진 석불들이 출토 되었다.
석정은 신라시대의 샘의 원형대로 보존 되고 있었다.
'호국삼룡변어정(護國三龍變漁井)' 으로 불리는 이 우물에 얽힌 전설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지금까지 전해져오는데 분황사 우물과 금학산 기슭 동천사의 동지와 청지라는 우물에는 각각 통일신라를 지키는 세 마리의 호국룡이 살고 있었다.
원성왕 11년(795), 황제의 비밀 지령을 받은 당나라 사신이 신라에 들어와 이 용들을 물고기로 변신시킨 후대나무통에 숨겨 잡아가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이들이 용을 잡아갈 수 있었던 것은, 북천의 물이 불어나 왕이 되지 못했던 김주원 후손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나라 사신들이 용을 잡아 떠난 그날 밤, 원성왕의 꿈에 두 여인이 왕 앞에 나타나 "우리는 청지와 동지에 사는 용의 부인인데 당나라 사신들이 우리 남편을 잡아가고 있으니 다시 데려다 주소서" 라고 아뢰었다. 이에 원성왕은 군사를 풀어 귀국하던 당나라 사신을 붙잡아 용을 데려오고 이들을 도와준 김주원의 후손 일당을 처형하였다. 다시 우물에 돌아 온 용은 신라를 지키는 호국용으로 살게 되었다"고 한다.
우물의 내부
안전을 위하여 철망을 쳐 놓았고 철망 아래로 장대석으로 만든 사각형의 모양이 보인다.
현재는 관광객들의 안전을 위하여 우물 내부에 철망을 설치하여 놓았지만 고인 물은 아직까지 식수로 가능하다고 한다.
분황사는 경북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천년고찰로 신라 서라벌 내에서 7개 가람중에 하나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 11교구인 불국사 말사이다
분황사는 설총의 아버지이자 요석공주의 남편인 '원효'가 (화엄경소)로 지은 장소이자 입적한 곳이기도 하다.
석탑 북쪽에 있는 분황사 보광전
분황사는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약사여래불을 모신 '보광전'을 1680년 5월에 다시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
분황사 보광전으로 분황사에 법당은 달랑 이거 하나 뿐이다.
이 아담한 건물 안에는 신라 당대 최대 규모의 약사여래좌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지금 그 불상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고, 지금의 보광전에는 조선 후기에 만든 약사여래입상이 자리 하고 있다.
분황사 법당 보광전에는 약사 여래불 입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9호)을 모셔 놓았다.
현재 보광전에 봉안되어 있는 약사여래불상은 1609년에 구리 5,360근으로 조성되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의 분황사 보광전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모든 중생의 질병을 구제해 준다는 의미의 약사여래불이다.
원래 분황사에는 무게 30만 6700근의 동(銅)으로 만든 신라 최대의 불상인 약사여래좌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1998년에 불상이 있는 보광전을 고쳐 짓기 위해 해체하던 중 발견된 기록을 통해 분황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탔으며 현재의 불상은 1609년에 동 5360근으로 만들었고 보광전은 1680년 5월에 다시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
불상의 왼손 위에 놓인 약그릇 뚜껑 안쪽에 ‘건륭(乾隆) 39년 을미(乙未) 4월 25일 만들었다’ 는 기록이 있지만, 건륭 39년은 을미년이 아니라 갑오년이기 때문에 이 기록을 사실대로 믿기는 어렵다.
불상의 얼굴은 둥글고 육감적이어서 세속적인 느낌을 주며, 때로는 어린이의 얼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두껍게 입고 있으며, 옷주름의 표현은 다분히 형식적이다. 손에는 약그릇을 들고 있어서 약사불임을 확인할 수 있다
원효(元曉)가 이곳에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썼고,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은 신화(神畵)로 일컬어졌다. 또한 절의 좌전에 있었던 천수대비(千手大悲) 벽화는 매우 영험이 있어서 눈 먼 여자 아이가 노래를 지어 빌었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고 전한다.
보광전의 외부벽화
보광전 문살
분황사는 서기 634년 선덕여왕 때 건립 되었으며,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율사와 원효대사가 머물던 곳으로 유명하다.
보광전의 측면
보광전의 후면
서라벌 곳곳에 불경소리 끊이지 않고 향냄새 그윽하게 풍겨오는 신라의 절집 마당에는 낙엽만 쌓여간다.
보관전 뒤 은행나무 한 그루가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그 옆으로는 스님들의 수행공간으로 따뜻함과 아늑함이 느껴진다..
은행의 노란 잎과 사찰이 잘 어울린다...
은행잎이 노랗게 떨어진, 정말 조용한 스님들이 수행하시는 곳에는 침묵만이 흐른다.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세월에... 다른 이유에... 깨어지고 떨어져 나갔지만... 이대로도 좋다. 이곳에 있어주니 말이다..
보광전과 스님 요사 뒷편의 분황사 야외 유물들..
무언가를 그리워하며 오랜 세월을 기다림에 지쳐버린 그런 느낌이랄까?
천년 전의 분황사는 많은 전각과 기도를 하는 인파가 끊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텅빈 자리에 낙엽만 쌓여 옛날의 화려했던 것은 한낱 꿈속으로 사라진지 오래이고, 모든 것은 씁쓸한 세월의 뒤안길 뿐이었다.
단풍이 진 숲길에는 바람에 뒹구는 낙엽들만 찬란했던 세월을 말해 주는것 같았다.
분황사 입구 모전석탑 옆의 야외 유물들..
분황사 입구 모전석탑 옆의 야외 유물들 앞의 비석
석등과 대석 같은 많은 초석들과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 모양의 돌들이 한켠에 단정하게 쌓여 있다.
분황사 한쪽 귀퉁이에 모아 놓은 주춧돌들의 규모로 보아 그 옛날 분황사의 영광과 규모를 짐작할수 있다. 아울러 세월의 무상함도..
단풍과 낙엽으로 가득한 분황사, 걸을 때마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나서 괜히 조심하게 된다.
사박사박 총총총.. 그런 걸음으로 낙엽 위에서 보내던 계절이 우리를 덮었다. 우리도 가을이 되는 순간 안부를 물어야 할 것 같은 그런 계절에 분황사를 걸었다.
분황사 경내를 낙엽을 밟으며 걷다 보면 어느새 가을의 스산함은 사라지고, 붉은 잎들이 하늘을 수 놓은 별처럼 보인다.
사부작사부작 떨어진 낙엽을 밟을 때마다 ‘올 가을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는 아쉬움을 금방금방 잊어버릴 만큼 분황사의 가을 풍경은 경이로웠다.
깊은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는 산사는 아닐지라도 내년 봄 분황사 경내는 또 어떤 모습일지 사뭇 궁금해진다....
황룡사지와 분황사는 신라 불교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사찰이다.
지금도 우리나라 불교의 기저에 깔린 화쟁사상의 성지이기도 하며, 신라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이기도 하다.
분황사의 종, 대종각 이다.
경주 분황사에도 가을이 깊어 가다 못해 익어 가고 있었다..
가을이 곱게 내려앉은 분황사에서 잠시 머무르며 분황사를 담아 보았다..
경주에서 분황사는 비교적 조용한 곳이다. 낙엽을 밟으며 머물러 본 분황사 가을의 끝자락...
경주 여행길, 이 가을이 가기 전에 분황사에서 만추를 느끼는 것도 경주여행의 또 다른 추억이 될 듯..
분황사를 둘러 보고 대릉원으로 향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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