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의 자리를 지키는 경북지방의 대표적 사찰 은해사(경북 영천시)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의 자리를 지키는 경북지방의 대표적 사찰 은해사
2016. 11. 4.
2016. 11 . 3. 지인과 함께 떠나 은해사 나들이를 나선다.
고즈넉한 풍경이 마음을 편안하게 다스리는 단아한 멋이 그대로 살아있는 은해사와 산내암자 중암암과 백흥암으로...
먼저 은해사 부터 둘러 본다...
은해사는 조선 31본산, 경북 5대 본산,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의 자리를 지키는 경북지방의 대표적 사찰이다. 그리고 교구 본사 중 본존불로 아미타불을 모시는 미타도량으로도 유명하다.
신라 41대 헌덕왕 1년(809년) 혜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사찰이 해안사인데 이 해안사로부터 은해사의 역사가 시작된다. 현존하는 암자만도 여덟 개가 있고 말사 숫자가 50여 개에 이르고 한국 불교의 강백들을 양성, 교육하는 "종립 은해사 승가대학원"이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불, 보살, 나한 등이 중중무진으로 계신 것처럼 웅장한 모습이 마치 은빛 바다가 춤추는 극락정토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은해사이다. 또 은해사 주변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 날 때면 그 광경이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듯 하다'고 해서 은해사라고도 한다. 신라의 진표율사는 "한 길 은색 세계가 마치 바다처럼 겹겹이 펼쳐져 있다.(一道銀色世界 如海重重)" 라고 표현한 바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19개 건물과 보물 제 1270호인 은해사 괘불 탱화 등 수많은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고, 또 사찰을 둘러 산 주변의 산세가 매우 수려한 까닭에 문화재 탐방을 겸한 산행을 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
이번에는 언제나 북새통을 이루는 팔공산 대구방면과는 달리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의 그 이면인 영천 은해서로 찾아가 보도록 한다 .
八公山 銀海寺 (팔공산 은해사)'란 현판이 있는 은해사 일주문이다. 현판글씨는 동곡당 일타 대종사의 작품이다.
은해사로 향하는 한즉한 길이 너무 좋다. 일주문을 지나 300년 동안 조성된 소나무 군락지를 감상한다.
은해사(銀海寺) 일주문을 들어서면서 팔공산 절골이 시작된다. 늘씬한 소나무와 활엽수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절골’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이 솔숲은 은해사의 역사를 품고 있는 산 증인이다.
노송이 아름다운 자태를 들어내고 있는 이곳은 금포정이다.
일주문을 들어서자 하늘을 가린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오솔길이 나 있다. 포근하고 정겨워 걷기에 딱이다.
일주문에서 보화루까지 약 500m의 길 양쪽으로는, 높이 10여 m가 넘는 300년생 이상 되는 소나무가 숲을 이룬다. '일체의 생명을 살생하지 않았다'해서 붙여진 '금포정((禁捕町)'이란 숲 이름이다. 그야말로 하늘을 찌른다 해도 과장됨이 없을 정도로 높이 솟은 소나무. 대나무와 함께 사군자의 기상과 체통을 유지하려 함일까? 휘어지거나 굽어졌지만, 꺾인 모습은 보여 주지 않는다. 그늘진 오솔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을 치유하기에 충분하다.
절에서는 1714년숙종 때 땅을 매입, 소나무 숲을 조성하여 오늘에 이르렀고, 2007~2008년에도 약 2천 주의 금강송을 식재하여 관리해 오고 있다.
'고관대작도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하마비 앞에 이르자 맞은편 보화루에 걸려 있는 보화루 편액이 반긴다.
'첩첩산중' 산에서, 왜 '망망대해' 바다를 비유해 이름 지었을까 의문이다. 그러나 답은 금방 찾았다. 보화루 앞으로 흐르는 계곡에서 돌 틈을 돌며 하얀 포말을 내는 것은 파도요, 고여 있는 물은 크기가 작은 바다로 보였기 때문이다.
숲길을 따라 조금 더 걸어가면 계곡 건너편에 사찰의 진입문인 보화루가 놓여 있다
은해사 가람배치
은해사 진입구인 보화루(寶華樓),
보화루에 서니 하늘거리는 바람이 상큼한 가을냄새를 실어다 주는것 같았다.
보화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누각식 건물이다.
1847년 화재로 극락전을 제외한 모든 당우가 없어졌는데, 이 때 누각도 소실되었다. 지금의 보화루는 그 이듬해 중건된 것이고, 추사 김정희가 현판문을 썼다. 그리고 1849 ∼1850년에 걸쳐 석연(碩演) 스님이 시주가 되어 보화루를 중수했으며, 태백산인(太白山人)이 단청을 했다. 또한 1920년에도 한 차례 수리되었다. 건물 정면에 걸려 있는 '보화루'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서 크기는 가로 235㎝, 세로 100㎝이다.
"寶華樓"란 현판 글씨도 추사 김정희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속진과 기교를 벗어 던지고 모나지 않으면서 살집이 있는 당당한 글씨가 나그네를 맞이한다.
천왕문이나 불이문과 같은 여느 사찰의 진입구조보다는 간결하다. 보화루 아래를 지나 들어가면 사찰의 안마당이 펼쳐진다.
정면에서 본 은해사 보화루는 은해사로 들어가는 출입문이다. 사찰에 따라 만세루. 우화루. 보제루 등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안으로 중심전각인 극락보전이 보인다. 누각의 가운데만 통로가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은해사 보화루는 삼문으로 되어 있다.
사찰의 출입문은 문짝이 없는 것이 특징이라 할수 있는데 보화루의 삼문은 문짝이 있었다.
보화루 아래 출입문의 금강역사
절마당에서 보여지는 보화루 이다...
극락보전 앞마당에서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는 잘생긴 향나무로 수령이 약 450년으로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 있다.
보호수와 종무소, 원주실로 사용중인 청풍당
극락보전 앞에서 바라 본 은해사 극락보존 영역이다..
보화루를 넘어서면 이 절집의 상징인 극락보전이 보인다.
은해사 대웅전 전경인데 2009년에 추사 김정희가 쓴 '대웅전' 현판을 떼어내고 그 자리에 '극락보전' 현판을 대신 달았다고 한다.
몇 해 전까지 대웅전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던 불전은 최근에 극락보전으로 바뀌어 있다.
극락보전은 정면 세칸, 측면 세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인 전형적인 조선후기의 다포계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사찰의 주불전 치고는 그리 큰 규모는 아닌데 단아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미타부처님을 본존불로 모신 극락보전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 367호)
조선시대 후기인 헌종 13년(1847년) 화재로 인해 전 당우가 소실된 후 팔봉(八峰)·해월(海月) 스님 등 은해사의 모든 스님들과 당시 군수 김기철(金箕哲)의 후원으로 이룩한 중창 때 새로 지은 건물이며, 그 뒤 1920년에 지석담 주지 스님 등이 중수한 바 있다.
극락보전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식 팔작지붕의 겹처마 건축물을 하고 있다.
어떠한 연유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걸려 있던 추사의 고졸한 서체로 쓰여진 '대웅전' 현판은 이제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곳 은해사에는 의외로 추사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대웅전 현판 대신에 자리하고 있는 '극락보전' 현판은 현재 생존하고 있는 중진 서예가 학정 이돈흥이 쓴 ‘극락보전’ 편액이 걸려 있다. 날카로운 방필의 역동적인 필획으로 강인함을 풍긴다.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모신 때문에 그렇게 바꾼 듯 하다.
아미타삼존불상
내부 중앙의 불단에는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극락보전 주존불인 아미타여래부처님을 협시(脇侍)하는 아미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아미타불상은 높이 136㎝로서 목조로 제작되었고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되었으며, 그 시대의 특징인 단아한 모습을 잘 보이고 있다. 중앙의 아미타여래상의 좌우 협시 보살은 최근에 모셔졌다.
후불탱의 구도로 보아서는 본래부터 삼존상으로 조성된 듯한데, 언제인가 좌우 협시보살상은 없어졌다가, 최근에 관음·대세지보살상을 봉안하여 지금처럼 삼존상으로 모셔지게 되었다.
대웅전에는 석가여래가 봉안되는 것이 원칙인데 지금처럼 아미타여래가 모셔진 것은 1847년의 화재와 관계 있는 듯하다.
철종 13년(1862년) 혼허 지조 스님이 지은 「은해사중건기」에 따르면 1847년에 극락전을 제외한 전 당우가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해에 바로 중건 불사에 들어갔는데, 이 때 극락전에 있던 아미타여래 및 탱화들을 새로 지은 대웅전으로 이운해 온 듯하다.
극락전은 화재를 모면했다고는 하지만 좌우 협시보살상은 이 때 어떤 손상을 입은 듯, 이운 과정에서 삼존불이 함께 대웅전에 봉안되지 못한 채 본존만 이운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아미타여래상은 선조 22년(1589년)의 극락전 중건시, 혹은 정조 21년(1797년)에 극락전을 중수할 당시 조성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불상의 양식상으로 본다면 1589년 중건 당시에 봉안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삼존불 뒤에는 아미타삼존도가 후불탱화로 걸려 있다.
후불탱도 역시 아미타 삼존불이며 역시 본존과 같이 극락전에 모셨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후불탱의 전호와 존상이 일치하지 않는 부조화를 이루고 있다. 정확한 제작시기는 화기(畵記)가 없어 알 수 없으나 서쪽벽에 걸려 있는 삼장탱(三藏幀)과 거의 비슷한 기법을 보이고 있어 삼장탱의 제작시기인 1775년(영조 31)과 비슷한 시기로 추정된다.
삼존상을 바라보며 우측에 1953년에 조성한 칠성탱화가 걸려 있고
오른쪽 벽면에는 괘불을 놓아 두는 괘불함 위에 괘불탱화가 있다.
극락보전 안에는 그 삼존상을 바라보며 좌측에 영조 31년(1755년)에 조성한 삼장탱화(三藏幀畵)가 걸려 있다.
은해사 극락보전 삼장탱화 (銀海寺 大雄殿 後佛幀畵 및 三藏幀畵)는 경상북도 유향문화재 제342호 이다.
왼쪽 벽면 쪽에는 1977년에 조성한 신중탱화와 소종(小鍾)이 있다.
극락보전의 주련 역시 생존하고 있는 중견 작가인 소헌 정도준의 예서로 장식되어 있다.
극락보전의 국화꽃 문살도 장엄하다..
화려한 극락보전 현판과 극락보전의 고색창연한 단청이 조화롭다.
괘불을 걸때 받쳐주는 돌기둥으로 2개 석주를 한쌍으로 법당 앞에 2쌍이 조성되어 있다. 기둥에는 둥글거나 네모난 구멍이 뚷려져 있다. 대웅전의 오른편에 조성되어 있는 두쌍의 돌기둥에는 "..팔월일조성(..八月日造成)" 이라고 새겨져 있다.
극락보전 앞에 자신의 소원을 적은 '소원지'들이 즐비하게 매달아 놓은것이 이색적이다.
아마도 아미타부처님께서는 꼭 소원을 들어주실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언제나 자비로운 미소로 화답할 것이다.
극락보전 추녀 아래에서 바라본 극락보전 영역
극락보전이 가운데 주 불전으로 자리하고 있고 그 양쪽으로 요사와 종무소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일반적인 사찰의 배치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데 종무소 건물이 너무 안쪽으로 붙어서 좌우의 비례가 어긋나 시각적으로 불균형을 이룬다. 사찰의 입지를 고려한 결과겠지만 조금만 더 신경 썼다면 시각적으로 완결성을 보일 수도 있었을텐데...
지장전(地藏殿)
대웅전 동쪽편에 있으며, 1997년에 지은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형식으로 화려하게 짜 올린 건물이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팔작지붕을 올리고 치미에 용머리가 조각되어 있고 천정은 우물반자로 마감처리 하였다.
창호의 측면은 1분합의 문으로 빗살문이며, 전면은 4분합으로 측칸은 빗살문으로 짜여져 있고 어칸에는 빗살문에 꽃을 조각하여 덧붙인 화려한 전각이다.
안에는 지장보살상을 주존으로 하여 지장후불탱이 있고, 그 주위로 지장보살상 1,000위가 봉안되어 있다.
지장전에서 바라 본 신검당. 설선당. 측면의 극락보전이 차례로 보인다..
단서각(單棲閣)은 극락보전 왼쪽인 서북쪽에 있으며,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1칸이다.
김달현(金達鉉)이 지은 「은해사중수기」에 따르면 지석담 주지가 1920년에 대웅전· 계삼당 (器三堂)· 보화루· 창고 등과 함께 단서각을 수선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19세기 말에 처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안에는 뒤편 중앙에 독성탱화가 걸려 있고 그 왼쪽에 금동 여래좌상과 소형의 금동 관음좌상, 오른쪽에 소형의 금동 약사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좌우 벽면에는 각각 인등이 놓여 있다.
독성탱화는 근래에 조성된 것이며 그림 아래쪽의 화기(畵記)에는 시주자들의 명단이 적혀져 있다.
여느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절집 이름이다. 절에는 많은 전각들이 있지만, 이처럼 '단서각'이라는 집 이름을 보는 것은 은해사가 처음이다.
산령각(山神閣)은 단서각 뒤로 나있는 계단을 따라 올라간 곳에 자리한다.
건축 형태는 맞배지붕이며 규모는 앞면과 옆면 각 1칸씩이다.
안에는 근래에 조성한 산신탱이 있다.
산신각앞에서 바라본 은해사 풍경이다..
조사전 이다.
조사전(祖師殿)은 최근에 지은 전각으로 은해사 개산조인 혜철국사를 비롯하여 은해사와 관련있는 큰스님의 존영이 봉안되어 있다.
조사전 내부에 모셔진 진영으로 중앙에 개산조사인 혜철국사와 그 좌우에 동곡당 일타 대종사와 고경당 법전 대종사이다
보호수와 청풍당
보화루를 지나 마당에 올라서면 마당 오른쪽에 있다. 청풍당은 종무소와 원주실이 있다.
심검당
대웅전 앞의 뜰 오른쪽에 심검당이 있다. 은해사 다실로 이용되고 있고 스님들의 수행과 주거공간인 요사채다.
도선당
보화루를 지나 마당에 올라서면 마당 왼쪽에 있다. 가운데 금강선원이란 현편이 걸려 있다.
측면에서 바라본 도선당
후면에서 바라본 도선당
차레로 후면의 설선당, 측면의 도선당, 측면의 조서전
설선당(說禪堂), 극락보전을 바라보며 왼쪽에 자리하고 있다..
심검담과 마주한 전각으로 대웅전 앞의 뜰 왼쪽에 있고 스님들의 수행과 주거공간인 요사채다.
행자님 방도 살짝~
스님 생활공간 호연당이 제일 뒷쪽으로 자리잡고 있다..
뒤에서 바라본 호연당과 은해사 전각들...
승가대학원이라고 한다. 너무 조용하여 들어 갈 수도 없어서 ...
지장전과 신검당 사이로 우향각이 보인다..
보기에도 고즈넉해 보이는 이곳이~ 은해사 주지스님이 머무시는 곳이라는데....
주지실로 지장전 바로 오른쪽에 있다. 이문은 옆문이고
정문은 심검당 뒤 장독대 옆에 있다.
심검당 뒷모습으로 장독대가 참 이쁘다. 이곳 저곳을 기웃거려 보는데....
주지실인 우향각 정문 앞에서 바라본 공양간
극락보전 앞 마당에서 성보박물관을 바라본 모습이다.
맞은편에 5층석탑과 성보박물관이 보인다. 왼쪽은 심검당, 오른쪽 건물은 청풍당이다.
청풍당 뒤쪽의 공양간
성보박물관 옆 담장이 참 아름답게 보인다. 담장끝이 불이문 이다.
불이문은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으며, 승 과 속이 다르지 않으며, 생과 사가 다르지 않으며 불이문은 이와 같아 양극을 떠나 일체 법이 평등하다고 보는 상징적인 문이다.
1998년에 개관한 성보박물관
추사 김정희의 글 佛光(불광)
절 마당의 오른쪽으로 성보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도 추사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추사 말년에 쓴 대작 가운데 하나인 '佛光'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佛光'은 추사의 글씨 가운데 가장 큰 글씨이기도 하다. 19c 말 전소되기 이전의 은해사는 추사가 느꼈던 것처럼 부처의 빛이 널리 퍼져 나가는 대가람이었을 테다...
당시 은해사 주지스님이 불광각에 걸기 위해 추사에게 글씨를 부탁했는데 꽤많은 시간이 지나도 글씨를 보내주지 않아 직접 찾아뵙고 간청해 벽장 안에 가득 써 놓은 불광이라는 글씨 중 가장 잘된 작품 하나를 골라 받아 오셨다.
추사가 당대 최고의 서예가 였으면서도 좋은 작품 한점을 얻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한대목이다.
추사가 써준 ‘불광’ 글씨로 편액을 만들려고 하니 통상적인 모양이 되지 않아 ‘불’자보다 유별나게 긴 ‘광’자의 글꼬리를 잘라 편액을 만들어 걸게 되었다.
훗날 은해사를 찾은 추사가 그 편액을 보자마자 당장 떼오라고 하여 절마당에서 불을 질러 태워 버린다.
주지스님께서 자신의 과오를 백배사죄 한 후 다시 글씨 원본과 같이 편액을 만들어 걸게 된것이 위의 것이다
공간 구성에 파격적인 모습을 느끼게 하는 글씨체이다.
추사 김정희가 쓴 것으로 알려진 "大雄殿" 현판, 이 밖에도 "銀海寺", "寶華樓", "一爐香閣"도 추사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추사는 실학사상가 가운데 북학파의 영향을 입은 사람이지만 불교와는 상당히 호의적인 관련을 맺은 인물이었다.
그는 1816년 잠시 경상감사(慶尙監司)를 맡은 적이 있는데, 그 때 은해사에 머무르면서 「대웅전」을 비롯해서
「보화루(寶華樓)」·「불광(佛光)」 등의 명필 편액을 남겼다
20세기에 김규진이 쓴 은해사 현판, 화려함으로 눈길을 잡는다
사진으로 보는 예전의 은해사 전경이다..
염불왕생첩경도
반야용선을 타고 아미타부처님이 계신 극락세계로 드는 모습을 장엄하게 표현하고 아미타부처님 설법을 들으며 연화화생하는 광경과 극락세계의 광경을 생생하게 잘 묘사하고 있다.
조선후기 널리 유행한 염불신앙을 반영한 자료로 높이 평가되고 있는 보기드문 작품이다. 30년전 도난 당했던 것을 은해사의 끈길긴 추적으로 다시 찾아 보물로 지정했다고 한다.
은해사 대웅전 아미타삼존도
아미타후불탱으로, 구도는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군도식(群圖式)이 아니라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관음과 대세지보살이 좌우에 협시하는 삼존만의 간단한 구도인 것이 특이하다.
아미타여래는 원형 두광에 거신광(擧身光)의 신광을 하고 있는데, 원만한 얼굴에 머리 위에는 정상계주가 있다.
왼손은 배 앞에서 엄지와 중지를 맞대었고 오른손은 밑으로 내리고 있다.
불의는 통견으로서 옷 끝이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으며, 거신광 안에도 모란·연꽃 등이 도안화 되어 있다.
관음보살은 왼손에 정병을 들고 있고, 대세지보살은 정병이 든 보관을 쓰고 두 손으로 서책이 놓인 연봉(蓮棒)을 잡고 있다.
이 후불탱에는 그림의 봉안년도를 비롯해서 봉안 목적, 그림을 그린 화사(畵師) 등에 대한 내용이 보이는 화기가 불단 뒤쪽으로 깊숙하게 내려져 있어 화기를 살펴보기가 매우 어렵다.
다만 그 일부 내용이 단편적으로 전해지는데, 제작년대는 영조 26년(1750년)으로 알려져 있다.
업경대
업경과 사자의 채색이 잘 남아 있으며 , 사자는 포효하는 모습이면서 해학적이다.
업경과 사자의 연결부분에 장식된 염라대왕 , 인간이 죽어 지옥에 이르면 염라대왕은 업경에 비친 선악을 판가름하여 가야할 지옥을 정한다고 한다.
보물 1604호로 지정된 금고 (쇠북)
금구, 범구, 반자라고도 한다.
주로 공양시간을 알리거나 대중을 불러 모을때 사용하는 것으로 龍架(용가)에 걸어놓고 두드려서 소리를 낸다.
가장 안쪽은 연판문을, 가운데는 가릉빈가, 봉황, 구름을 가장 바깥쪽에는 12개의 연판문이 있다.
명문에 이 금고는 1646년 신령 수도사에서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계종 전계대화상이셨으며 은해사 조실이셨던 일타스님은 미국 하와이 와불산 금강굴에서 입적하셨다. 일타스님 친가, 외가를 포함 41명의 스님을 낸 집안으로 불연 깊은 가족사도 잘 알려져 있다. 부처님 이후 한가족이 이렇게 많이 출가한 적이 처음이라고 한다.
일타스님 사용하시던 유품.
대웅전 후불탱.
은해사 괘불탱 (보물 제1270호)
조선 영조 26년에 화원, 처일, 보총에 의해 그려진 괘불독존도 형식의 아미타여래상으로 화려하면서도 기품있고 단아한 입상이며 화면 중앙부 양쪽의 단화에 배치된 붉은 꽃과 상단좌우에 비치된 극락조와 천개장식은 불세계의 평화스러움을 상징표현한 것으로 지금까지 조사된 괘불화에서는 볼수없는 내용이라고 한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이 열릴 때 법당 앞 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 만든 대형 불교그림를 말하는데, 이 불화는 거대한 화면에 불을 단독으로 그린 형식으로 비단 바탕에 채색되었다.
이 괘불의 불(佛) 좌우로 대칭되게 장식을 넣어 자칫 단조로워지기 쉬운 화면을 조화롭게 나타 내었다.
녹색의 머리광배에 붉은색의 옷을 입고 있으며, 둥근 얼굴에는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어깨선 또한 둥글게 처리되어 전체적으로 원만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를 나타낸다.
화면 윗부분의 양쪽에는 새와 덮개 장식이 있고 중앙부의 양쪽으로는 모란이 배치되어 있어 불세계의 평화스러움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황토바탕에 붉은색과 녹색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필치가 매우 정밀하면서도 세련되어 활기찬 인상을 준다. 영조 26년(1750년)에 제작된 이 괘불은 연꽃이 활짝 피어난 연못으로부터 천상세계로의 상승을 나타낸 상징적인 화면구성을 하고 있으며 원만한 형태, 세련된 필선, 적절한 색의 조화 등이 매우 돋보이는 18세기 불화 중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건융15년(1750년)으로 경자년 영조 26년에 화원(火員) 보총(普摠) 처일(處一)에 의하여 제작된 것으로 아미타불 독존형 이다.
재료는 견본(絹本)이며, 크기는 가로 5.59m 세로 10.16m의 보기 드문 초대형의 걸작으로 좌우상단에는 봉황을 배치하고, 그 아래로는 목단과 연꽃을 장식하여 장엄한 모습이다.
특히 하단 좌우는 연꽃이 있는 연못을 표현하여 극락세계를 상징하고 있다.
색조는 녹색과 홍색 위주로 상당히 우아한 기품이 있으며, 상호(相號)는 원만한 편으로 조선 후기 영.정조시대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선의 흐름이 매우 유연하고 18세기의 불교미술 발전상을 잘 알 수 있고 그림 좌우 테두리는 범자(梵字)가 장식되어 있다.
지보사 지장도
극락보전 안에 봉안되어 있었던 극락구품회탱은 1750년 성청(性淸)· 옥련 금어가 그린 뛰어난 작품인데, 현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은해사는 한국을 빛낸 여러 고승들을 배출했다.
신라시대에는 우리나라의 불교역사를 만드신 원효,의상스님 고려시대는조계종의 종조이신 보조국사 지눌스님,삼국유사를 저술하신 일연스님(*일연스님과 원효스님의 추모 다례재가 매년 열린다.)
백초당 대종사
조선시대에는 홍진국사가 머무르시면서 선교양종의 총본산으로 되었다. 최초에는 향곡, 운봉, 성철스님 등 수많은 선지식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성보박물관 앞에서 본 풍경으로 좌로부터 심검당. 우향각. 오층사리탑 그리고 요사이다..
좌로부터 청풍당. 심검당. 우향각.오층석탑
성보박물관 앞에서 바라본 풍경으로 좌로부터 심검당. 우향각. 요사.
은해사 성보박물관 앞 오층석탑과 전각들 뒤로 팔공산의 산자락이 겹겹이 둘러쳐져 있다...
범종각 현판의 글씨가 유난히 눈에 띈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다...
보화루 서쪽에 자리하며, 사각 중층 건물이다.
1층에 범종이 있고, 2층에는 운판·목어·법고가 있다. 범종은 1976년에 조성했으며, 높이 170㎝이다.
목어는 조선시대의 것으로서, 길이 209㎝, 너비 50㎝이다.
1850년(철종 1) 혼허 지조 스님이 지은 「종각단확서문(鍾閣丹綺序文)」에 따르면
1850년에 종각이 중수된 것을 알 수 있는데, 목어 역시 이 때 중수와 함께 조성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은해사 금고=쇠북( 보물 제 1604호)이다...
법전사물 ( 법고, 운판, 목어, 범종)을 두는 것이 일반적인데 반해 은해사 범종루 2층에는 법고 대신 금고=쇠북( 보물 제 1604호)가 걸려 있다
신라시대부터 사찰에서 사용되던 악기로서 한쪽은 두드리는 면이며 반대편은 속이 비어 있는 징 모양을 하고 있다
일타스님의 뜻에 따라 법고에 사용되는 가죽마저도 살생이라 여겨 쇠북을 사용했다고 한다
은해사 입구에 있는 범종각과 도선당 사이에 위치한 수각이다..
은해사를 충분히 둘러보고 보제루를 나선다...
보제루 앞에서 바라본 은해사 풍경으로 입구에 공양간이 보인다..
보제루에서 바라본 은해교 아래로 흐르는 계곡과 노송이 아름다운 자태를 들어내고 있는 금포정이다.
보제루 앞에서 은해교를 지나 금포정쪽으로 가면 솔숲이 우거지고 발걸음을 얼마 옮기지 않아 부도전이 나타난다.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을 부도가 주류를 이루고 여러 선사의 비석들이 줄지어 자리하고 있다
부도에서 바라본 은해사 전경이다.
'일체의 생명을 살생하지 않는 생명의 숲', 금포정 길을 바라다 본다...
부도전 앞에서 바라본 은해사 전경이다..
담장에서 가을냄새가 나는 은해사를 지나쳐
보화루를 향해 왼쪽 돌담을 끼고 좁다란 숲길로 계곡을 끼고 가면~ 은해사 산내암자로 가는 길이다..
2.5km 거리에 있는 은해사 산내암자인 백흥암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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