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이 깃든 팔공산의 고찰 대구 동화사
봉황이 깃든 팔공산의 대구 동화사 2016. 1. 24.
2016. 1. 19. 한국불교대학 도반들과 들러본 대구시 동구 도학동 35번지에 위치한 동화사 이다....
대구 도심에서 동북쪽으로 22km 떨어진 팔공산 남쪽 기슭에 신라 소지왕 15년(493년)에 극달화상이 세운 절로 그때 이름은 유가사였으나 흥덕왕 7년(832년)에 심지왕사가 다시 세울 때 겨울철인데도 경내에 오동나무가 활짝 피었다고 해서 동화사라 이름을 고쳐 불렀다고 한다. 절 입구는 수목이 우거져 있고 사철 맑은 물이 폭포를 이루며 흐른다. 팔공산 동화사는 대구 경북지역을 관리하는 대한 불교 조계종의 9교구 본사이다. 현재 동화사 서쪽 대형 주차장이 아닌 동화사의 옛 일주문 앞의 매표소에서 매표 후 봉황문을 통한 동화사를 향했다. 팔공산의 일주문은 '봉황문'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여기가 옛 동화사로 들어가는 출발지점이 되는 곳이다. 지금은 동화사 후문 쪽에 커다란 주차장이 조성되어 대부분 사람들이 그곳을 통해 절로 향하고 있다. 동화사를 참배하러 찾은 사람이면 동화사 후문 쪽에 커다란 주차장이 있는 그 길을 이용하여도 좋을 것이나 답사를 목적으로 절을 찾은 사람이라면 옛 일주문인 봉황문을 통하여 절로 향하는 길의 정취를 느껴보면서 걷는 것이 좋지 않나 싶다... 동화사는 크게 두개의 일주문이 있다. 내가 들어온 동쪽의 봉황문과 서쪽에 위치한 동화문. 동화사는 입장료 성인 2,500원과 주차료 소형 2,000원 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는 매표소를 들어서면 서서히 동화사에 다다르게 된다. 멀리 일주문인 봉황문이 보인다. 동화사의 터가 알을 낳는 모습이었기에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는데 이 일주문으로 향하는 동안 보이는 주변 경치가 참 아름답다.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는 일주문을 지나치면 서서히 동화사에 다다르게 된다. 그리고 동화사 옛 일주문으로 길을 정해야 하는 이유 중에 또 하나가 봉황문 오른쪽 암벽에 새겨진 아름다운 마애불을 만나고 가야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늠름한 일주문의 자태에 비해 바위 암반에 작고 얕게 새겨진 마애불은 언뜻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스쳐 지나버리게 될 것 같다... 입구의 구름 타고 하늘을 내려오는 아름다운 모습이 새겨진 동화사 마애불좌상(보물 제243호) 동화사 마애불좌상(磨崖佛坐像)은 봉황문 옆 암벽 위쪽에 있다. 5월말, 오후 5시가 되면서 마애불에 햇빛이 들기 시작한다. 마애불이 새겨진 곳은 바위가 아니라 자유 자재로 그림을 그린 종이처럼 보인다.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겨진 둥근 얼굴에 오종종한 눈, 코, 입에서는 포근함이 넘친다. 머리와 몸 주변에서 나오는 빛은 석양과 만나면서 황홀할 지경이다. 우리나라에서 매우 아름다운 마애불중의 하나이다. 좀 더 높은 곳에 모시고자 하는 마음이 반영된 듯 마애불은 3단의 연꽃 대좌 위에 앉아 있다. 게다가 가볍고 푹신푹신한 느낌이 들 정도의 많은 구름들, 그리고 신비한 느낌이 들게 말아 올린 구름 끝을 올려다 보면서 사람들은 신비감과 함께 경배심을 함께 키웠을 것으로 보인다. 풍만하게 살이 오른 얼굴과 미소를 머금은 입가의 표정에서 깨달은 자의 자비로움이 엿보인다. 동화사 중창시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마애불은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미륵불을 새긴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진표율사, 영심대사를 이어서 심지대사가 중창한 동화사가 미륵불을 중심으로 하는 법상종의 계보에 속했기 때문일 것이다. 미래의 이상 세계가 오면 미륵불은 하늘에서 이 세상에 내려와 용화수 아래서 중생들에게 세 번 설법을 해서 이전에 교화되지 못한 사람들을 구원한다. 고려와 후백제의 후삼국 통일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의 불안과 두려움은 매우 컸을 것이다. 이 미륵불은 전쟁 없고 평화로운 새 세상이 빨리 오기를 희망하는 그들의 염원을 수 없이 들어 주었을 것으로도 보인다. 두 손은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고 있으며 다리는 반가부좌한 자세로 오른쪽 다리를 대좌 아래로 자연스레 내려놓았다. 두 어깨를 덮은 법의(法衣)는 세밀하면서 유연하고 오른쪽 어깨에 달린 가사의 끈 장식과 아래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그림을 보듯 생동감이 있다. 배 모양의 광배(舟形光背) 안에는 두 줄의 선으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따로 표현하였고,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불상의 머리 주위를 깊게 파내어 양각의 효과를 효율적으로 드러냈으며, 대좌로 내려 갈수록 얇은 선각을 함으로써 구름의 신비함을 잘 보여주고 있는 수작이다. 동화사가 9세기 중엽에 심지대사에 의해서 크게 중창된 사찰이라고 본다면 동화사 마애여래좌상 역시 9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 시기 무렵에 제작된 것이라 봐도 무방할 듯 싶다. 옛 일주문인 봉황문 먼저 동화사는 동쪽의 일주문에 봉황문이라는 이름을 붙여 봉황의 터전임을 알리고 있다. 팔공산 동화사 봉황문(八公山桐樺寺鳳凰門)’이라 하여 특별히 봉황이라는 글씨를 넣었고, 글자 수도 9글자로 다른 사찰과는 좀 다르고, 주역에서 말하는 구(九)의 강함으로 봉황을 머무르도록 하고 있다. 일주문에 '八公山桐華寺鳳凰門' 이라 쓴 기성 쾌선스님의 글씨 그런데 사찰의 이름에는 봉(鳳)이라는 글씨가 없고 오동나무 동(桐)자만 쓰고 있다. 아마 봉황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를 않고 대나무가 아니면 먹지를 안는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대웅전 뒤에는 대나무와 오동나무숲이 우거져 있다. 봉황문을 들어서서 바라 본다. 동화사 가람배치도 동화문으로 들어가서 작은 주차장에 차를 주차 후 사찰 안내도를 본다. 주차장에서 위쪽으로는 대웅전이 아래쪽으로는 약사여래대불이 위치하고 있다.. 아래쪽으로 약사여래대불 부터 보기로 한다. 유난히 침엽수가 많아서 그런지 아직 잎도 피지 않은 계절이지만 초록의 푸르름을 느낄수 있었던 곳.. 계곡 어귀에 오석(烏石)으로 된 작은 시비(詩碑)가 보인다. 조선 전기의 문신 서거정(徐巨正)이 당시 대구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시구 (칠언절구로 표현한 대구10경 중 제7경 )가 새겨져 있다. 이곳은 조선 徐居正선생이 대구십경중 제7경 '桐寺尋僧동사심승'의 자리 이다 동사심승(桐寺尋僧_ 동화사 찾는 스님) (노산 이은상 역) 遠上招提石徑層 (원상초제석경승) 층층이 돌길 더듬어 절 찾아 가는 걸음 靑縢白襪又烏藤 (청등백말우오등) 푸른 행전 흰 버선에 검은 등나무 막대 짚었거니 此時有興無人識 (차시유흥무인식) 내 흥을 모른들 어떠리 興在靑山不在僧 (흥재청산부재승) 흥은 청산에 있다네.
자그마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계곡을 느끼고 맑은 공기를 느끼며 만난 형태가 특이한 소나무. 계곡과 잘 어우러지는 그 S라인.... 그리고 그 초록과 유난히 파란 하늘은 나의 눈에 충분한 휴식을 주는 듯 하였다.. 정말 이 날 하늘은 너무 파래서 하늘만 찍고 또 찍었던 것 같다.. 일주문을 거쳐 절 마당으로 걸어오는 길 저 만치 언덕위에 동화사 통일대전이 마련되어 있다. 주차장에 주차 후 그렇게 길을 걷다 만나게 되는 웅장한 계단.. 웅장하다고 하기에는 좀 그런가? 왠지 연인들이 가위. 바위. 보를 하며 내기 계단 오르기를 하는 그림이 떠오르는 계단.... 저 계단을 올라가면 동화사 통일약사대불을 만날 수 있다.. 보이는 계단은 108개로 하여 백팔번뇌를 상징 한다. 통일약사대불전으로 오른다.. 이곳은 석불 맞은쪽에 있는 약사여래대불을 지킬 통일대불전 통일대전을 올라가는 계단 위에 있는 ‘금강계단’이라는 편액이 보인다. 통일대전에 들어가 보았는데 다른 곳과 달리 불상을 볼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창으로 통일대불을 보며 부처님을 모실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통일대전을 올라가는 계단 위에 있는 ‘금강계단’이라는 현판을 봐도 부처님을 따로 모시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통일약사여래불 맞은 편에는 통일대전과 성보박물관이 있는데, 창가에 비친 통일약사여래불의 모습이 참 인상 깊다. 약사여래대불 앞에는 지하2층, 지상3층, 연건평1,200평 규모의 통일기원대전이 약사여래불을 지키고 있다. 동화사 '통일기원대전' 편액, 제6공화국 노태우 전 대퉁령의 친필이 누각에 걸려 있다. 통일대전과 성보박물관의 모습 동화사 통일대전은 노태우 대통령이 재임하고 있던 시절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권 국가들이 붕괴되어 가는 과정에서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차원에서 조성된 공간이다 노태우 대통령의 출신지가 이곳 동화사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동네이다 보니 동화사 경내에 공간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성보박물관은 통일대불전에 속해있는 공간이나, 3층인 법당과는 출입구가 다르다. 성보박물관은 통일대불 맞은편 출입구로 들어오면 되고 2층과 1층은 전시 공간이며, 지하1층은 영상홍보실과 체험학습실이 있다. 통일대전의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성보박물관도 함께 있다. 동화사 성보박물관은 뜻있는 스님들의 발의와 국고지원을 통해 1999년부터 공사를 진행해, 2000년에 1전시실, 2004년 2전시실, 2006년 홍보영상실을 완공하여 2007년 10월20일 개관하게 되었다. 박물관에는 사명당 유정 진영(보물 제1505호), 대구 동화사 목조 약사여래좌상 복장전적(보물 제1607호), 대구 동화사 아미타회상도(보물 제1610호), 동화사 보조국사 진영(보물 제1639호), 동화사 부도암 신중도(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8호), 동화사 죽암당 대선사 선찰 진영(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9호) 를 포함한 많은 성보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좌측편의 동화사 보조국사 지눌 진영 (보물 제 1639호) 그러한 사명당 유정의 진영 바로 옆에 보조국사 지눌의 진영도 같이 마련되어 있다 보조국사 지눌은 고려 중기의 고승으로 현재 한국 불교 교단의 주축을 형성하고 있는 조계종을 창시한 스님이다 고려 중기 선종과 교종의 대립을 화합으로 이끌었으며 전남 순천 송광사에서 수선사 결사를 주도하여 불교 개혁운동에도 앞장섰던 이다 이와 더불어 수많은 저술을 통해 '선(禪)'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하여 불교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승려가 바로 지눌이다. 동화사에서 제작된 지눌의 진영은 제작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제작기법 등을 통해 청나라 순치연간(1664~1661)에 제작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보조국사 지눌 진영은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 그려졌지만 동화사의 것은 고졸하고 단아한 조선 중기 초상화의 특징을 잘 갖추고 있어 최근에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 53호로 지정되어 있던 것을 보물 제 1639호로 새롭게 지정하였다. 성보박물관의 내부 개관 이후 불교문화 전문박물관으로 동화사를 비롯한 동화사에 소속된 여러 절의 성보문화재 보관 및 소장품 확보, 체계적인 관리와 보존, 연구에 힘쓰고 있으며, 불교와 관련된 특별전과 기획전을 통해 많은 정보와 자료를 제공하고, 다양한 문화강좌와 문화체험을 진행하고 있다. 동화사 천룡도 동화사 염불암 극락구품도 동화사 칠성도 동화사 삼장보살도 (보물 제 1772호) 보조국사 지눌 진영과 사명당 유정 진영 외에도 성보박물관에는 또 하나의 보물이 전시되어 있다 삼장보살도는 죽은 이들의 영혼을 천도하기 위한 의식용 불화로 천장보살 · 지지보살 · 지장보살로 구성된 그림이다 이는 고려시대에는 제작된 사례가 없고 조선시대에만 보이는 도상인데동화사의 삼장보살도는 가로로 긴 화면 속에 세 보살과 모든 권속들을 그려 넣은 그림이다 제작자는 18세기 초 대표적인 화승 중 한명이었던 의균 스님에 의해서 발원되었으며 안정된 구도와 비례 · 세부적인 인물의 묘사 · 짙은 색채감 · 세밀한 필선과 정교한 문양 등으로 인해 매우 우수한 불화라고 평가되어 최근에 보물 제 1772호로 새롭게 지정되었다 눈앞에 드러나는 통일약사대불. 그리고 광명석탑들. 통일약사대불은 30m 높이의 석불은 108명의 석공들이 약 7개월 동안 만들었고 한다. 규모가 세계최대라고 한다.. 정갈한 마음을 담아 기도를 올린다.. 2014년부터는 오랜 역사를 지켜온 팔공산을 시민들에게 돌려준다는 취지로 약사여래로 향하는 길의 통제를 철폐했다. 늦은 밤이라도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약을 받고 싶거든 찾아가 볼 만하다. 팔공산은 신라시대부터 오악(五岳) 가운데 하나인 부악(父岳)으로 추앙받던 민족의 영산(靈山)이자 약사신앙의 중심지로서, 팔공산 곳곳에는 수많은 약사여래상이 모셔져 있다. 약사여래는 보살도를 닦으면서 열두 가지 큰 원(十二大願)을 세워 성취하고, 중생의 고통과 일체 병자가 없는 이상세계를 완성하신 부처님이시며, 그 이상세계는 유리처럼 청정한 동방만월세계(東方滿月世界)이다. 우리 역사 속에는 불력(佛力)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였던 대규모 불사의 예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통일약사대불의 본원은 우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하루빨리 성취하고 분단의 아픔을 해소하여 민족 대화합을 이루어 내는 데 있다. 석불속에는 미얀마 정부에서 기증한 부처님의 진신사리 2과가 모셔져 있으며 통일을 염원하는 우리민족의 뜻이 모여 이곳에 봉안되었다고 한다. 약사여래대불 앞에는 국내 최대의 삼층석탑(높이 17m, 원석 2천톤) 2기가 있다. 약사여래대불 뒤로는 호법신장과 금강역사가 병풍처럼 조성되어 있다. 통일대불 옆에는 팔공산 약사여래 통일대불 봉안 연기문이 적혀 있다. 이 많은 글귀 중에서도 유독 돋보이는 글귀가 있었다. 함께 읽어볼까? 팔공총림 동화사 국제관광禪체험관(법화보궁)은 동화사의 상징인 약사여래대불 지하에 조성된 전국 유일의 선(禪)을 테마로 한 체험관이다. 2012년 4월 1일에 개관한 체험관은, 지하 1층 2710.2㎡ 규모로 전통禪수행관, 초조대장경 밀레니엄관, 禪문화관, 천년도량의 터 팔공산, 정진의 터, 명상의 터, 다도의 터 등 7가지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선체험관은 한국 선불교의 역사와 정신을 재정립 하고, 팔공산과 동화사를 찾는 내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동양 정신문화의 정수인 간화선 수행법을 소개하며, 글로벌 트렌드인 선, 명상, 수행 등을 신한류 문화상품으로 개발해 관광산업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천년 고찰로 석조 통일약사여래대불로 유명한 동화사가 체험관을 통해 선을 테마로 한 독특한 문화관광지가 되고, 특히 생활 속의 선 수행을 전파함으로써 현대인들에게 마음의 번뇌, 갈등을 치유하고 힐링을 제공하고 있다. 십우도의 모습 십우도는 마음의 본성을 찾아 수행하는 단계를 동자가 소를 찾는것에 비유해 묘사한 불교 선종화로 이 선종화를 병풍으로 제작된 모니터에 글과 에니메이션을 통해 10단계로 표현해 놓았다는 것이 상당히 주목할 만 하다. 명상의 터는 선 체험관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은 200m2 가량의 규모로 산속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는 점이 참 재미있다. 스피커에서는 새 소리, 물 소리와 같은 자연의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으며 곳곳에서 보이는 바위 위에 앉아 각각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 참 흥미로운 곳이다. 바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스님의 지도를 받으며 명상의 시간을 잠시 가져보는 것도 이곳 동화사에서 잠시 여유로움을 즐겨볼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광 월광보살 동탱화, 금박 불족 등이 각 면에 만들어져 있는 선수행관 선 체험관의 마지막 코스라고 할 수 있는 선수행관에서는 일광 월광보살의 동탱화와 금박 불족 등이 각 면에 만들어져 있는 것을 만나 볼 수 있다. 일광보살 동탱화 (약사여래 좌협시보살) 약사여래대불을 좌측에서 모시는 일광(日光)보살과 사천왕상을 청동으로 조성하여 금박을 입혔다. 청동 800kg, 금박 1만장, 금분 100g, 큐빅 20개를 사용하였다. 월광보살 동탱화 (약사여래 우협시보살) 약사여래대불을 우측에서 모시는 월광(月光)보살과 사천왕상을 청동으로 조성하여 금박을 입혔다. 법화경 판각, 석각 황금경판 조성 법화경 7만자를 목판에 새겨 황금경판과 천연 연옥에 새겨 황금경판으로 조성 중이다. 사리탑 인등, 사리탑 모양의 인등을 1년 내내 밝히고 있다. 인등공양을 접수중이다.
두손모아 부처님께 기원하옵나니 불사에 정성모아 동참한 인연공덕으로 국토는 우순풍조하고 중생은 고통과 번뇌를 초월하여 불국정토를 성취하게 하옵시며 우리 모두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하나되어 통일되게 하옵시어 영겁의 시간 흐르고 또 흘러도 자손만대 통일조국에서 복락 누리게 하옵소서. 석조부처님족상, 부처님 족상을 석조로 조성하였다. 소원탑, 종이 소원탑을 공양 올리는 곳이다. 또한 법화경 7만자를 서각, 석각의 황금경판으로 각각 조성하는 대작불사가 진행 중이며, 2014년 7월 1일 능도 덕문 주지스님이 소장하고 있던 부처님 진신사리 7과를 이운해 모심으로써 법화보궁(法華寶宮)으로 거듭나고 있다. 황금사리보탑 (부처님 진신사리 7과 봉안) 청동 1.4톤, 금박 22,000장, 금분 200g, 큐빅 300개, 원석 300개를 사용하여 거룩하게 조성하였으며, 오색 영롱한 부처님 진신사리 7과를 봉안하였다. 불교문화관을 나와 통일약사대불을 뵙고 나와 동화사 사찰 경내로 발걸음을 옮겼다.
통일대불을 지나 동화사 옹호문으로 이르는 길은 마치 보물 찾기를 하는듯 하다. 인악대사비명 인악대사비는 봉황문을 지나서 비탈진 계곡 길을 한 참 오르다 보면 금당선원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인악당(仁岳堂)이란 편액이 걸린 허름한 비각 안에 비석이 봉안되어 큰 스님인 인악대사의 전기(傳記)를 새겨 놓았다. 동화사 인악대사비의 받침돌도 봉황 모양으로 조각하였다. 스님의 이름은 의첨(義沾)이요 법호는 인악(仁嶽)으로 고려 개국벽상공신대광사공(大匡司空) 성산부원군 이능일의 23 세손으로 달성 인흥에서 1746년(영조 22) 아버지 휘징(徽澄)과 어머니 달성 서씨 사이에 태어났다. 여덟 살 때 향교에 들어가 <소학>을 읽었는데 그 뜻을 깊이 이해하였다. 재주가 이웃마을에까지 퍼졌을 뿐만 아니라, 품행도방정하여 고을 사람들이 도와주면서 혹시 대성하지 못할까 걱정하였다고 한다.
열다섯 살에 이르러 <시전> <서전> <주역>을 다 읽고 문장도 잘 지어 이름 난 선비가 되었다. 열여덟 살 때 동료들과 함께 인근에 있는 용연사에 들어가 공부를 했는데 엄숙한 분위기에 감동이 되어 가선헌(嘉善軒)공에게 출가하고 벽봉(碧峯)화상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다. 벽봉스님은 그가 큰 그릇임을 알고 <금강경>과 <능엄경>을 가르치는 한 편으로 서악(西嶽), 추파(秋波), 농암(聾巖) 등 여러 대사의 가르침을 받도록 했다.
23세 되던 해 비로소 벽봉화상의 후계자가 되었다.
계보로는 중국 당나라 때의 선사 임제로부터 34세이고, 임란 때 구국운동에 앞장섰던 서산대사(西山大師)로부터 8세손이며, 상봉대사의 5세손이다. 그 후 다시 화엄종장 설파(雪坡, 1707~1791)화상을 찾아가 아우가 되기를 자청해 승낙을 받았다.
비슬산, 팔공산, 불영산 등 여러 곳의 사찰을 돌면서 불법을 펼쳤다. 스님은 배우는 사람들의 수준을 고려하여 누구나 알기 쉽게 강의하여 당시 최고의 명강사로 통했으며, 유학에도 조예가 깊어 배우는 선비들이 많았다고 한다.
1790년(정조 14)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당(願堂)으로 수원에 용주사를 지으면서 주관할 이름 난 스님을 고르라고 하니 스님이 선발되었다.
스님께서 불상(佛像) 복장에 넣을 기원문을 지었는데 정조가 이 글을 보고‘어찌하여 스님이면서 이처럼 문장을 잘 하는 이가 있단 말인가 ’하고 격찬하며 선물을 주었다고 한다.
스님에게 왕이 직접 선물을 준 사례는 사명당, 벽암 이후 없었던 일이라고 한다.
1796년(정조 20) 당초 머리를 깎았던 용연사 말사 명적암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51세 법랍 34년이다. 부도는 같은 절 적멸보궁 왼쪽에 있다. 저서로 <화엄사기> <금강사기> <인악집> 등이 있다.
비석의 받침돌은 보통 사각형의 다듬은 돌을 많이 썼다. 인악대사비의 받침돌은 봉황모양을 하고 있다. 새 중의 우두머리요, 초자연적 존재인 봉황 한 마리를 절 초입에 모셔 놓은 꼴이다.
비각도 지나고... 조병현 유공불망비(巡相國趙公諱秉鉉有功不忘碑) 부도탑비 동화사 당간지주는 금당선원으로 올라가는 언덕 위, 인악대사비 옆에 위치하고 있다. 동화사 당간지주 (보물 제 254호) 당을 내걸었던 당간은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 사라지고 없어져 당간을 받치고 있던 지주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동화사 당간지주는 보통의 여느 당간지주들과 달리 절 마당으로 향하는 길 곁에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지주를 마련하였다. 하부에는 간공을 하나 마련하였고 상부에는 간구를 마련하여 당간을 지탱했던 것으로 보인다. 간공을 뚫어 당간을 지탱하는 방식은 초기 당간지주에 많이 나타나는 방식으로 고려시대를 지나면서 점차 사라져 간다. 동화사의 당간지주 역시 9세기 심지대사에 의해 중창된 그 시기 무렵에 조성된 석조로 보면 될 듯 싶다. 동화사 마당으로 들어오는 길 곁 언덕에 당간지주 한 기와 작은 석탑 한 구가 눈에 들어온다. 상부가 부서진 탑이 눈에 들어온다.당간지주를 마주보고 있는 석탑 상단부의 파편인듯한 큼직한 돌 하나가 낙엽위에 딍군다.
동화사 '사적비' 해탈교(解脫橋) 앞 모퉁이에 위치해 있으며 동화사의 사적(事跡)을 기록하고 있다. 거대한 화강암을 ‘홀’모양으로 가운데를 파서 다듬은 벽비(壁碑)인데 비개는 용두(龍頭)로 장식하였다. 또 조금 오르면 나무 그늘아래 그리고 절로 향하는 길에서 또 조금 오르면 조금은 외떨어진 솔숲 나무 그늘아래에 도학동 승탑이 자리하고 있다. 곳곳에 자리한 유물이 이곳이 천년고찰임을 말해주고 있다.
승탑이 자리한 곳은 절 중심되는 영역에서 극락전으로 향하는 길 사이에 자리하는데 극락전은 현재 스님들의 수행처로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하다. 부러 승탑을 찾아보러 오는 발걸음이 아니라면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일반적일 듯 싶다.
도학동 승탑 (보물 제 601호) 승탑의 정식 명칭은 동화사 승탑이 아닌 '대구 도학동 승탑'이다 도학동 승탑은 원래 동화사 경내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북지장사와 동화사 사이의 산줄기에 자리한 내학마을 절터에 무너져 있던 것을 현재의 터로 옮겨온 것이다. 사각의 지대석 위에 팔각원당형으로 조성된 이 승탑은 통일신라 승탑 조형의 기본방식인 팔각원당형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승탑이다. 처음 팔각원당형 승탑이 제작되기 시작했을 무렵의 작품인 염거화상탑 · 쌍봉사 철감선사탑과 비교해 보았을 때 승탑 전반부에 형식화가 많이 진전되었기에 고려시대를 지나는 무렵으로 승탑의 편년을 추정해 볼 수 있겠다.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승탑의 조형은 기본적인 팔각원당형을 계승하되 수많은 변주가 이루어진다. 그러한 경향 속에서도 도학동 승탑은 충실히 기본형을 계승하되 그 조성방식은 조금씩 후퇴하고 있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도학동 승탑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다른 승탑들에 비해 세련된 조각의 멋과 화려한 장식은 없지만 전체적으로 안정적인 비례와 수수한 자태가 또 단정한 멋을 자아내고 있다. 도학동 승탑은 홍진국사 혜영(弘眞國師 惠永)(1228-1294)의 탑으로 추정되는 부도탑이다. 홍진국사는 고려 말 법상종을 크게 부흥시킨 승려로, 국존(國尊)으로 책봉되었으며,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과 동화사 주지로 임명되었다. 또한 그는 동화사를 크게 중창하여 고려 말 법상종의 중심사찰이 되게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탑본으로 남겨진 비문에 의하면 그의 입적 후 동화사에 탑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탑은 통일신라 이래의 팔각당형(八角堂形) 부도탑의 전통을 잘 계승하고 있다. 특히 844년에 만들어진 염거화상탑의 비례와 형태를 따랐다. 그러나 지붕의 기왓골이나 부조상 등이 표현되지 않은 점은 차이가 있다. 기단에는 상대와 중대석, 중대 받침은 있으나 하대석이 없다. 지대석(地臺石)을 방형(方形)으로 하고 안상(眼象)을 표현한 것 등은 이 시기의 특징으로 보인다. 도학동 승탑이 놓여진 길을 따라 조금 더 좁은 오솔길을 따라 오르면 금당선원의 입구에 다다르기도 하고..
금당선원으로 올라가는 언덕 금당암은 그 암자를 폐하고 현재 선원으로 탈바꿈 했다. 그래서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이곳은 참으로 고요만이 감도는 어쩌면 가장 절다운 곳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극락전과 극락전 내 삼존불, 극락전 좌우의 삼층석탑, 수마제전과 수마제전 내 불상 이 모든 것 마저 선정에 들었는지 다만 고요뿐. 금당선원은 스님들의 수행공간으로서 일년에 단 한차례 초파일때에만 일반인에게 개방이 되고 있다. 동화사 금당선원. 삼국유사에 나오는 금당암 자리는 심지왕사가 던진 불골간자가 떨어진 곳으로 추정되는 창건 당시의 영역이다. 이미 승탑이 놓여진 곳부터 스님의 수행처이니 출입을 금지해 달라는 팻말이 적혀 있었기에 극락전을 둘러싸고 있는 담벼락 부근까지 갔다가 이내 다시 발걸음을 돌려 나올 수 밖에 없을 듯 싶다. 금당선원은 동화사의 동쪽 별당이다. 삼국유사에 진표로 부터 영심을 거쳐 심지에게 전해진 간자를 봉안할 곳을 찾아 팔공산에 와서 던졌을 때 간자가 떨어진 우물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석우, 효봉 대종사를 비롯, 성철 등 해방 이후로 불교 정화의 주체가 된 많은 승려들이 이곳에서 결사를 세웠다. 1974년 5월 증개축 불사로 정비되었으며, 사찰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삼층 석탑 2기(보물 제248호)가 극락전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좌측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수마제전 (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6호) 수마제전(須摩提殿)은 동화사 금당선원 내에 위치해 있다. 수마제는 ‘극락’이라는 뜻으로 수마제전이란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인 극락전의 또 다른 이름으로서, 금당선원에는 두 개의 극락전이 있는 셈이다. 법당은 조선 1702년(숙종28)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면1칸 측면1칸에 맞배지붕 건물로 얼핏 보면 산신각으로 보일 정도로 작고 단출한 모습이다. 그러나 겹처마를 채택하고 내외 3출목의 다포식 공포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부처님을 모신 전각으로서의 격을 살필 수 있다. 수마제전 내부에는 금동아미타불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대좌는 팔각으로 된 석조대좌이다. 건물의 규모는 작은데 아미타불상은 대형에 속해 대조적이다. 상호는 다소 살이 오른 듯하며 단정하게 묘사되어 있다. 허리가 길게 표현된 것이 특징이다. 옷은 통견의 형식을 채택하였으며, 옷 주름의 표현은 형식화된 모습이다.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의 수인을 하고 있는데 조선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동화사 금당암 동 · 서 삼층석탑 (보물 제 248호) 그나마 극락전 앞에 둘러진 담벼락 사이로 저 멀리 동화사 금당암 동 · 서 삼층석탑 가운데 서탑 한 기가 눈에 얼핏 들어온다. 얼핏 봐도 꽤나 준수하게 생긴 통일신라시대의 삼층석탑이다. 금당암 동 · 서 삼층석탑은 동화사 답사에서 살펴보고 오리라 계획한 답사처였지만 스님들의 수행을 방해할 수는 없기에 잠시 눈으로만 살펴보고 다시 걸음을 뒤로 하고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금당암 극락전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1호) 극락전은 금당선원 내에 있는 전각이다. 조선 숙종 연간(1675~1720)에 중건된 것으로 생각되며,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다. 극락전의 기단은 동화사의 여타 전각과 다르다. 보통은 길게 재단된 석재나 자연석을 쌓는 조적식 기법을 사용하는 데 비하여 극락전에서는 넓게 자른 판석을 세워 연결하는 가구식 기법을 사용하였다. 통일신라시대 목탑을 석탑화 하는 과정에서 자주 사용되던 방식이다. 내부에는 아미타삼존불상과 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이와 함께 보기를 추천하는 전각이 극락전이다. 극락전은 서방정토를 이루는 아미타불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짓는 전각이다. 금당암 입구 도학동 승탑에서 바라본 동화사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봉서루 앞 마당에 있는동화사 설법전의 뒷쪽에서 본 모습이다. 3층 건물인 설법전, 2층에는 스님의 발우 공양장소인 선열당이 있으며, 1층에는 신도들이 공양하는 후원이 있는곳이다. 설법전 열으로 통일범종각과 화엄당의 뒷쪽이 보인다. 금당안에서 다시 해탈교쪽으로 내려와서 대웅전 방향으로 올라 간다. 잠시 머물렀던 계곡물이 해탈교를 지나 길고긴 여정을 시작한다. 아마도 낙동강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통일대불을 지나 해탈교를 건너면 계곡 물을 옆에 끼고 동화사 옹호문으로 이르는 길은 얼음아래로 물이 흐르고 낙엽쌓인 풍경에 마음을 빼았긴다. 해탈교(解脫橋)는 동화사 약사대불에서 인악대사비. 당간지주를 지나면 만나게 되는 아치형 다리이다. 오래된 절에 가면 이렇게 동그란 아치형를 종종 볼 수 있다. 이 아치형 다리를 건너면 속세에서 벗어나 부처의 말씀을 듣는 곳으로 가까이 가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자유로운 마음과 몸으로 깨달음을 얻으러 간다는 불교적 상징물이다. 해탈교(解脫橋)는 아치형 구조의 다리로 다리 아래로는 시원한 계곡물이 흐르고 있는데 냇물 가운데 대야 모양의 돌이 놓여 있어 관광객들이 동전을 많이 던지는데 꽁꽁얼어 보이질 않는다.. 이 다리를 건너면 옹호문을 지나 대웅전으로 가는 길이다. 이 다리를 건너 108계단을 오르면 드디어 동화사의 천왕문인 옹호문을 볼 수 있다. 해탈교를 건너서 108계단을 오르면 두마리의 용이 지키고 있는 계단을 올라서니 저만치 천왕문인 옹호문이 보인다. 옹호문 들어서는 입구의 계단 끝지점의 인악대사 나무 높다란 아름드리 나무 인악대사 나무는 수령이 약 500년 된 느티나무로 설법전 우측에 위치해 있으며 동화사와 인연이 깊은 인악대사를 기리기 위해 인악대사 나무로 명명하였다. 수령 500년에 수고 20m, 나무둘레 5.4m 거목으로 문화적, 역사적 가치가 있어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동화사의 서쪽에 동화문이 생기기 전에는 봉황문이 동화사의 유일한 문이었으나 동화지구와 함께 동화문이 생기면서 부터 동화사를 방문하는 관광객들 거의 대부분이 이용하는 동화문으로 들어오는 곳으로 위쪽으로는 대웅전이 아래쪽으로는 약사여래대불이 위치하고 있다.. 동화문과 봉황문 어느곳으로 와도 만날 수 있는 동화사의 천왕문인 옹호문이다. 擁護門 柱聯
擁護聖衆滿虛空 (부처님과 모든 중생을 옹호하기 위해 허공에 가득차고) 都在毫光一道中 (모두가 부처님의 휘광이 한결같이 佛道 가운데 있으며) 信受佛語常擁護 (부처의 말씀을 받고 믿으시며 늘 옹호하며) 奉行經典永流通 (부처의 경전을 영원히 유통하시고 받들어 모셔야 한다) 옹호문(사천왕문)' 사이로 '봉서루' 풍경이 보인다... 동화사 옹호문 안에는 사천왕상이 봉안되어 있고 수 많은 소원지가 꽂혀 있다. 발걸음을 이제는 동화사의 절 마당으로 향했다. 옹호문 들어서면 동화사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봉서루 앞 마당에 설법전이 있다. 봉서루 앞 마당에서 보면 단층으로 보이는 3층 건물인 설법전, 2층에는 스님의 발우 공양장소인 선열당이 있으며, 1층에는 신도들이 공양하는 후원이 있는 곳이다. 금당선원 입구 계곡에서 바라본 설법전 여러겹의 건물들이 동화사의 깊이를 말해주는 느낌이다. 동화사는 전하는 연혁에 의하면 신라 소지왕 15년(493)에 극달이 창건하여 유가사라 하였다 한다. 신라 소지왕 연간 신라에 불교는 이미 들어와 있긴 하였겠지만 불교의 공인이 이루어진 것은 6세기 법흥왕 연간(527)이니 극달스님의 창건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을 듯 싶다. 다만 신라하대 흥덕왕 7년(832)에 심지대사가 절을 중창하였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것이 동화사의 시작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절의 이름이 동화사가 된 것은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절 주위에 오동나무꽃이 만발하였다'하여 '동화사(桐花寺)'라 하였다 한다. 심지는 흥덕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왕자 출신으로 어릴 때 부터 불교에 매우 심취하였다. 그는 출가하여 팔공산에서 수도하던 중 속리산 길상사에서 영심이 그의 스승 진표로 부터 계를 받고 법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갔다. 그러나 때가 늦어 절 밖 땅에 엎드려서 참배를 하게 되었는데 진눈깨비가 심하게 내리는 동안에도 심지의 둘레로는 눈이 내리지 않아 모두들 신기하게 여겨 절 안으로 들게 하였다 한다. 그는 그곳에서 열심히 수도하여 영심으로 부터 법통을 계승하는 간자를 물려받고 원래 수행을 하고 있었던 팔공산으로 돌아와 이곳에 절을 짓고 동화사의 개산조가 되었다. 김제 금산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백제 유민들의 넋을 달랬던 진표율사는 그 법을 제자 영심에게. 영심은 그 법을 심지에게 전함으로서 대구 동화사는 보은 법주사 · 김제 금산사와 더불어 법상종 계열의 3대 사찰로 발돋움 하며 명망을 떨쳤다. 그 후로도 몇 차례 중수와 중건을 거치면서 현재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 봉서루 발걸음을 이제는 동화사의 절 마당으로 향했다 절 마당으로 들어가기 전에 봉황이 깃들어 있는 누각인 '봉서루'를 지나게 된다 '봉황이 깃든 누각이라는 뜻'의 봉서루가 대웅전 앞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다. 봉서루 오르기전 좌측의 육화당 (종무소 및 접수처) 봉서루 마당 앞 찻집 뒤로 봉서루 오르며 우측으로는 통일 범종루가 있다. 통일범종루 종각, 범종각, 종루라고도 한다. 불교의 4물 - 범종, 법고, 목어, 운판 범종(梵鐘) : 모든 일체 중생을 제도 법고(法鼓) : 축생(짐승)을 제도 목어(木魚) : 물속중생제도(수행정진) 운판(雲版) : 허공을 헤메는 고독한 영혼을 천도(우주) 통일 범종각과 설법전 사이의 앞마당 한쪽에 있는 원음각(종각)이다. 조(朝), 석(夕) 예불과 기타 불사(佛事)를 행할 때 사용하는 종이다. 봉서루 처마가 너무나 날렵하다. 이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 중간에는 봉황의 꼬리를 상징하는 자연석이 떡하니 놓여져 있다. 이 누각 오른쪽 귀퉁이에 있는 둥근 돌은 봉황의 알을 상징하는데, 이를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니 한번 찾아 볼 일이다. 동화사의 터가 풍수상으로는 봉황이 알을 품은 형세라고 하니 여러 모로 봉황이 깃드는 자리에 미리 적합한 이름을 붙여둔 셈이다. 봉서루(鳳棲樓) 봉(鳳)황이 서(棲-살 서) 사는 곳이라는 뜻으로 봉황의 둥지인 셈이다. 그래서 봉서루 입구 돌 계단을 오르기 전에 중앙 분리대 초입에 봉황의 꼬리를 닮은 자연석 바위 한가 안치되어 있는데, 이것이 봉황의 꼬리를 상징하는 돌이다. 바위 위에는 알 치고는 제법 큼지막한 흰 색깔의 둥근 돌 3개가 있는데, 이 돌이 바로 봉황의 알을 상징한다. 봉서루는 봉황이 꼬리는 내밀고 알을 품고 있는 몸통에 해당한다. 알을 품고 있는 봉황은 팔공산 정봉을 향하고 있다 봉서루 오르며 우측으로는 통일 범종각이 좌측으로는 육화당이 자리한다. 봉서루 오르는 돌 난간의 여의주를 문 장엄한 난간석인 용 조각상이다. 봉서루를 통과해서 들어오면 본격적인 동화사의 중심마당에 닿게 된다. 봉서루 천장에 매달린 연등 봉서루의 들어가면서 우측 누각 1층에는 여러 불교 기념품을 구매할 수가 있었는데 조금 있다가 들려야겠다. 봉서루 누각아래에서 동화사 대웅전으로 향하면.. 대웅전 마당에서 바라본 봉서루이다. 봉서루는 ‘봉황이 깃든 누각’이라는 뜻으로 현재는 주로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사용하는 곳이다. 네모난 돌기둥을 세워 누문을 만들고, 그 위에 정면 5칸의 목조 누각을 세운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세워졌으며, 고려와 조선을 지나는 동안에도 동화사의 사세는 그럭저럭 유지되어 왔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사명대사가 동화사에 거점을 두고 전국의 승병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영남도총섭(嶺南都摠攝)으로서 동화사에서 승병(치병)을 지휘했던 연고에 따라 봉서루 안에는 '영남치영아문(嶺南緇營牙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봉서루를 지나면 만나는 팔공산 아래 햇살 잘 드는 곳에 위치한 대웅전(大雄殿) 보물 1563호 세조(世祖) 10년(1465년)에 수리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존하는 대웅전 건물은 선조 39년(1606년)에 학인에 의해 세워진 것을 숙종 3년(1677년)에 한 번 수리하였고, 최종적으로 조선 영조 3년(1727년)에서 영조 8년(1732년) 사이에 수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헌종 4년(1838년)에 다시 수리하였다. 장대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가공하지 않은 나무를 그대로 활용하여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축대 아래 양쪽에는 한 쌍의 괘불대와 노주가 있고, 법당으로 오르는 층계는 정면에 반원형으로 쌓아 올렸다. 대웅전을 오르는 계단의 좌우 대웅전 앞뜰에는 괘불대와 함께 2기의 노주(露柱)가 설치되어 있다. 괘불대는 영산재, 수륙재 등의 야외 법회 즉 야단법석(野壇法席)을 개최할 때 중생들에게 불화를 괘불(掛佛)할 때 괘불을 걸어 고정시키는 데 사용되는 석조물이다. 석조로 된 괘불대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야외 법회가 자주 있었음을 보여준다. 봉황의 몸통은 봉서루이고 긴 목을 빼어 머리가 닿은 곳이 대웅전이다. 대웅전은 봉황 머리를 상징한다. 그런 설명에 부합하듯이 대웅전 뒤에는 울창한 대밭이 있다. 대밭 사이에, 그 주변에 수십 그루의 오동나무가 자라고 있음도 볼 수 있다. 오동나무 숲에 둥지를 튼 봉황이 대나무 숲에 머리를 박고 열매를 따먹고 있는 모습이 연상 된다. 조선 승병의 근거지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불에 타 전소되었던 동화사는 조선후기 들어 몇 차례 중건이 이루어졌다. 동화사의 대웅전 역시 그러한 조선후기 중창 불사 과정에서 새롭게 지어진 건물이다. 청량여래불, 한도 끝도 없이 우리 심신을 청량하게 하시는 부처님, 또는 청량지, 열반과 같이 괴로움이 없는 청료한 자리, 청량삼매, 일체의 밉고 곱고의 증애심이 없는 자리 등의 말은 참선의 개운한 맛을 나타낸 말이다. 대웅전 안에는 석가여래, 아미타여래, 약사여래의 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1728년 왕준이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개를 숙여 글을 읽고 있는 듯한 이 삼존불상들은 조선시대 선비를 떠올리게 하며 진경산수화풍의 탱화, 천장을 장식하는 봉황이 생기를 불어 넣고 있다. 대웅전 안에는 여러 점의 불화가 걸려 있는데, 삼존상 뒤에 있는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는 1620년에 조성되었고, 동쪽 벽면에는 신중탱과 지장탱가 있다.
동화사 대웅전 신중탱 중단의 신중탱화는 위태천(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제석천, 범천 및 제 신중들을 모시고 있다. 동화사 대웅전 대웅전의 하단인 영가단에 봉안된 조선 후기의 지장시왕도 (보물 제1773호) 지장보살과 좌협시 도명존자, 우협시 무독귀왕 그리고 명부 시왕과 판관, 사자, 녹사 등 권속들을 잘 묘사하고 있다.. 동화사 지장시왕도는 1728년 경상남·북도 지역의 25개 사찰의 승려와 신도들이 함께 발원·시주한 작품으로, 18세기 중엽 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수화승 쾌민이 6명의 화승들과 함께 제작하였다. 구도에서는 지장보살과 시왕, 판관, 지옥사자, 선악동녀, 옥졸, 6보살 등 35명에 달하는 인물들을 표현하면서도 중앙의 본존에 비하여 권속들을 상대적으로 작게 묘사하므로써 많은 권속들을 효과적으로 배열하였다. 전체적으로 인물들의 형태에 안정감이 있고 신체비례가 적절하며, 채색은 녹색과 적색을 중심으로 차분하면서도 안정된 색감을 느끼게 한다. 또한 동화사의 대화승인 의균이 화주가 되고 그 제자들이 제작에 대거 참여함으로써 17세기말∼18세기 전반 의균을 중심으로 하는 경북 지역 불화 화풍을 잘 보여준다. 조성연대가 확실하며, 참여한 화승들의 명단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며, 18세기 초 지장시왕도의 양상 및 경북 내륙 화사들의 화풍상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삼장탱화와 지장탱화는 대웅전이 건립된 무렵인 1728년에 제작 되었다. 서쪽 벽면에는 삼장탱화가 있다. 한국의 불교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삼장 탱화이다. 중앙의 천장보살과 좌,우 협시인 진주, 대진주 보살, 우측의 지장보살과 좌우 협시인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좌측 지지보살과 좌우 협시인 용수, 다라니 보살 그리고 제 권속들을 함께 묘사하고 있다.
불단에는 석가모니를 주불로 왼쪽에 아미타불, 오른쪽에 약사여래불의 삼세불을 봉안하고 그 위에는 극락세계의 장엄을 입체적으로 표현한 닫집이 있다.
대웅전 천장에는 세 마리의 용과 여섯 마리의 봉황(극락조)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어 아주 일품이다.
봉황은 대웅전 안에도 있다. 그것도 여섯 마리나 된다. 대웅전 천정을 살펴보라. 앉아 있는 자태가 마치 글을 읽고 있는 선비와 같은 삼존불상 머리위에 극락조라고도 불리는 봉황 여섯 마리가 날개 짓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다른 사찰에는 두세 마리의 봉황이 고작이거늘 동화사 대웅전에는 여섯 마리나 되니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봉황의 터전에는 봉황이 있어야 한다. 그 봉황을 붙들어 두기 위해서는 둥지를 트는 오동나무와 먹잇감인 대나무가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 우리네 마을이나 고을 풍수에서도 이러한 현상을 쉽게 볼 수 있으니, 동화사에 오동나무와 봉황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웅전 꽃살문은 정면 정칸은 4분합문으로 가운데 두짝은 활짝핀 모란꽃이 새겨진 세모솟을빗살, 그 양옆은 빗살에 모란과 봉우리가 새견진 꽃살이다. 우협칸은 3분합문으로 가운데 꽃은 꽃잎이 하나 하나 떨어져 있으니 국화꽃, 양옆으로는 육모솟을빗꽃살인데..육각형과 삼각형이 만나서 이루어지는 원형 모양 안으로 금강저 모양이 살짝 보이는 불교의 상징성!! 좌협칸도 3분합문으로 가운데 꽃은 국화로 모양이 같고 양옆으로는 세모솟을빗꽃살이다. 좌우 협칸은 3분합문으로 가운데 문짝 빗국화살은 모양이 같으나, 양옆의 문짝은 좌협칸 육모솟을빗꽃살 우협칸은 금강저 문양이 새겨진 세모솟을빗꽃살로 서로 다른 꽃살이 쓰였다. 정면 정칸은 4분합문으로 가운데 두짝은 활짝핀 모란꽃이 새겨진 세모솟을빗살, 그 양옆은 빗살에 모란과 봉우리가 새견진 꽃살이다. 활짝핀 모란꽃! 청, 홍, 백 화려하게 단청이 칠해져 꽃의 입체감을 더해준다. 모란꽃과 모란 봉우리.. 정칸 가운데 있는 모란꽃과는 많이 다르지만...요것도 모란꽃. 국화처럼 보이지만... 꽃잎이 바람개비처럼 돌아가는 모양으로 표현된 것은 모란꽃이라고 한다. 정면 어칸의 중간 두짝 활짝핀 모란꽃과 그리고 좌우로 모란꽃과 모란 봉우리
동화사의 중심인 대웅전은 정교한 꽃살창문으로 오고 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대웅전의 품위를 한층 끌어올리는 것은 바로 출입문에 그려져 있는 꽃살창문이다. 부처의 신력을 담은 금강저와 함께 활짝 핀 모란과 국화꽃이 새겨져 있어 화려함을 더한다. 특히 맨 정면에는 정교하게 채색되어 활짝 피어난 모란은 사람들의 눈을 확 끌어당긴다. 부처에게 올리는 여섯 가지 공물로 향, 등, 차, 과일, 꽃, 쌀을 든다. 이 중 꽃은 한 송이를 피워내기 위해 오랜 시간을 견뎌낸다는 점을 들어 수행을 뜻하기도 하고 그 아름다움으로 장엄한 부처의 세계를 나타내기도 한다. 부처님을 모신 전각에 정성을 들여 한층 장엄한 세계를 현현하고 싶었던 옛 사람들의 마음이 전해져 오는 유물이다. 문마다 다르게 조각된 꽃살문도 무척이나 아름답다. 꽃살문은 부처님께 꽃을 공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협칸은 3분합문으로 가운데 꽃은 꽃잎이 하나 하나 떨어져 있으니 국화꽃 양옆으로는 육모솟을빗꽃살인데..육각형과 삼각형이 만나서 이루어지는 원형 모양 안으로 금강저 모양이 살짝 보이는 불교의 상징성!! 동화사 대웅전의 문살은 위치에 따라 각각 다르다. 좌협칸도 3분합문으로 가운데 꽃은 국화로 모양이 같다.. 부처에게 올리는 여섯 가지 공물로 향, 등, 차, 과일, 꽃, 쌀을 든다. 이 중 꽃은 한 송이를 피워내기 위해 오랜 시간을 견뎌 낸다는 점을 들어 수행을 뜻하기도 하고 그 아름다움으로 장엄한 부처의 세계를 나타내기도 한다. 부처님을 모신 전각에 정성을 들여 한층 장엄한 세계를 현현하고 싶었던 옛 사람들의 마음이 전해져 온다. 양옆으로는 세모솟을빗꽃살이다. 좌우협칸 가운데 문짝은 모두 빗국화살~ 좌우 협칸은 3분합문으로 가운데 문짝 빗국화살은 모양이 같으나, 양옆의 문짝은 좌협칸 육모솟을빗꽃살 우협칸은 금강저 문양이 새겨진 세모솟을빗꽃살로 서로 다른 꽃살이 쓰였다. 대웅전의 정면 문짝에 조각된 꽃창살이 매우 아름답게 불전을 장식하고 있다. 어칸과 협칸 모두 빗솟을 살에 활짝 핀 연꽃과 국화꽃, 금강저를 새겨 놓았다. 심지왕사가 절을 지었을 때 겨울임에도 하늘에서 오동꽃이 흩날렸다는 창건 설화는 이 꽃살문을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이렇게 동화사 대웅전에는 총 7종의 아름다운 꽃살문이 쓰다. 단청이 아름답게 더해져 화려움을 더한다.. 대웅전 우측면은 전퇴칸에 쓰인 세모솟을빗꽃살.
대웅전 좌측면에도 우측면과 같은 세모솟을빗꽃살~~ 세모솟을빗살 바탕살에 일원(一圓)과 금강저 문양이 새겨져 있다. 대웅전 배면.. 배면 정칸에는 문설주를 세워 3짝의 독립된 외여닫이문을 3분합문처럼 연접하여 꽃살문을 썼다.
가운데 문짝만 문고리를 단것으로 보아... 출입을 위한 문은 아닌듯~ 가운데는 좌우측면의 꽃살문과 같은 모양의 세모솟을빗일원금강저살, 그 양옆은 정자꽃살이 쓰였다. 대웅전 뒷편 뒤틀린 기둥... 자연스러운 멋이 풍긴다. 대웅전의 편액은 일주문에 〈八公山桐華寺鳳凰門〉이라 쓴 기성 쾌선스님의 글씨와 흡사하다. 주련은 영남 서화의 맥을 계승한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1862~1935)가 썼다. 대웅전의 기둥은 가공하지 않은 뒤틀린 아름드리나무를 그대로 기둥으로 사용하여 자연미와 함께 안정감도 준다.. 팔공산의 산세와 조화를 이루는 대웅전은 작지만 위엄있는 건물이다. 산신각에서 바라본 대웅전의 고운 단청 대웅전 주련
天上天下無如佛 ( 천상세계나 지상세계에서 부처님 같은 분이 없으니 ) 十方世界亦無比 ( 시방세계를 다 둘러봐도 또한 견줄 데 없네 ) 世間所有我盡見 ( 세간에 있는 것을 내가 다 보았어도 ) 一切無有如佛者 ( 모두가 부처님 같으신 분이 없다네 )
대웅전 주련은 영남 서화의 맥을 계승한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1862~1935)가 썼다. 대웅전 좌측 뒤에 '산신각'이 보인다.
산령각 또는 산신각은 산악숭배나 마을신앙과 관련되어 있다. 대체로 1평 정도의 집에 산신당이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산령각이라는 명칭 외에 산신당·산명당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도 한다.
산신은 보통 지역수호신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으며, 산 뿐만 아니라 산 주변의 지역을 관장하는 신으로 여겨졌다. 한국의 불교사찰에 있는 산신각은 고유 신앙의 수용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민간의 신앙이 두터운 칠성도 같이 모셔졌다. 명칭은 산신각·칠성각·삼성각 등으로 불린다. 현재 불교에서는 산신을 가람수호신과 산 속 생활의 평온을 지켜주는 외호신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산신각은 불교 밖에서 유입된 신을 모시는 건물이기 때문에 ‘전’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각’이라 하며, 이는 한국 불교 특유의 전각 가운데 하나이다.
대웅전 뒤쪽에서 바라본 산신각 조사전 동화사를 거쳐간 역대 고승의 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대웅전 뒤편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18세기 건물이다. 동화사를 처음 세웠다는 극달 화상과 중창조 보조국사, 사명대사, 세장, 두여, 의첨, 지화, 총륜,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석우 스님 등 존영이 봉안되어 있다. 칠성각
칠성은 원래 중국에서 도교신앙과 깊은 관련을 맺고 형성된 다음 우리나라에 유입된 신으로, 처음에는 단순한 수호신으로 불교 속에 수용되었다가 다시 수명신 본래의 모습이 강조되고 불교화됨에 따라 독립된 칠성각을 만들어 봉안하게 되었다. 칠성각은 우리나라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의 전각 중의 하나로서, 한국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우리나라 불교사의 초기 및 중기의 사찰에서는 칠성각을 찾아 볼 수 없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차츰 나타나기 시작하여 현재는 전국 대부분의 사찰에 건립되어 있다. 억불(抑佛)의 시대에 수명의 연장을 기원하는 하근기(下根機)의 중생을 접수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으로, 칠성은 수명신의 구실과 함께 가람수호신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이 칠성각에는 소재회상도(消災會上圖)인 칠성탱화(七星幀畫)만을 봉안한다.
칠성각 서쪽으로는 심지대사 나무인 동화사의 유래가 될 만한 오동나무가 있다. 봉황이 살수 있도록 사찰 주변에는 대나무가 많았다.
사각사각 밟히는 모래소리가 좋았던 그 곳.. 절 마당에는 주불전으로 대웅전이 자리하고 있고 그 양옆으로 수 많은 당우와 전각들이 들어서 있다. 대웅전 근처의 선방을 기웃거려 본다. 대웅전 마당으로 대웅전을 바라보며 우측의 화엄당(강원) 이다. 법화당 맞은편에 자리한 화엄당은 역시 강원으로 3,4 학년 학인스님들의 학사로 사용되는 곳으로 법화경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화엄당 전각 뒷쪽으로 '동화 강원'이란 현판이 보인다. 동화총림의 강원인 스님들의 전문 승가대학으로 1.2 학년 학승들이들이 공부하며 거처하는 건물로써이다. 총림(叢林)이란 강원(講院), 선원(禪院), 율원(律院)을 다 갖춘 사찰을 말한다.
법화당은 대웅전 좌측인 서편에 ㅁ자형태로 위치한 건물로 현재 강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3.4 학년 학승들이들이 공부하며 거처하는 건물로써 대승경전인 법화경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조실체(좌), 동별당(우)....그 리고 '삼층석탑.. 영산전은 대웅전 동편 뒤 담장으로 둘러싸인 별채에 위치해 있다. 조실체 쪽으로 영산전이 있다. 영산전 맞배지붕에 겹처마 형식의 건축 양식을 갖춘 현재의 영산전은 현종 10년(1669년)에 학찬(學贊)이 세웠던 것을 1920년 중건하였다.
영산전은 나한전, 또는 응진전이라고도 한다. 현판 글씨는 서예가 해사 김성근의 글씨이다.
내부에는 불경의 영산회상의 모습을 재현하여 석조 석가삼존불을 중심으로
십육나한상이 좌우로 열좌해 있다.
영산전 동편의 내부 벽화 장엄한 천정의 연꽃 단청 천정 벽화 영산전의 동편 외부 벽화 영산전의 뒷편 외부 벽화 영산전의 서편 외부 벽화 영산전의 오른쪽 요사는 조실채로 사용하고 있다. 영산전과 우측 요사를 지나 가장 중심의 깊숙한 곳에 자리한 염화실 영산전에서 바라본 동별당과 화엄전 영산전 영역을 나와 대웅전 마당으로 나온다. 심검당(尋劒堂) 심검당이라는 이름은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는 뜻으로, 참선이나 불경 강설용으로 쓰이는 건물에 주로 붙이는 이름이다. 동화사 심검당은 조선 선조 38년(1605년)에 천령(天靈)에 의해 지어졌다. 1919년 3.30 대구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영남 지방학림의 승려 아홉 명이 당시 만세운동 계획을 결의하고 수립했던 장소이다. 현재의 건물은 1978년에 중건된 것으로, 동화사 승려들의 생활 주거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신검당 옆의 서별당 절에서 만난 전동차. 이곳에서 아주 유용할 듯도 하다.. 대웅전 마당의 배례석 보물창고인 동화사 대웅전 영역을 둘러보고 이제 천천히 봉서루를 내려 선다. 다시 대웅전 마당으로 나와 봉서루를 내려 간다. 아까 봉화루 들어서면서 보았던 불교용품점이 봉화루 누각 아래에 있다. 요즘 어딜가든 자주 볼 수 있는 부엉이 집에 부엉이가 있으면 좋다고 한다.. 봉서루 나서며 바라본 통일범종루 이다. 봉서루 옆에 나란히 있는 범종각도 뒤로하고.. 불교용품점을 나와 봉서루 앞 마당에서 다시금 동화사를 한번 뒤돌아 보고.. 옹호문을 지나서 봉황문 일주문으로 들어와 주차를 해 놓은 해탈교쪽으로 내려간다. 동화사 사적비와 당간지주. 인악대사비도 지나고 약사대불가는길도 지나서 주차해둔 금당선원 아래 소형주차장으로 향한다. 금당선원 아래 소형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봉황문쪽으로 향하면서 탐플스테이관.약수암 갈림길을 지난다. 오늘은 시간이 안되어 약수암과 주변의 향곡선사 부도탑. 부처님 진신사리 부도탑도 못보고 그냥 간다. 동화사 봉황문으로 향하는 길에 하늘이 내마음처럼 파아랗다.... 보물창고 동화사를 나서는 내마음이 봄날처럼 훈풍이 분다.. 처음 들어왔던 동화사의 동쪽 일주문 봉황문을 나선다. 봉황문을 나서니 저만치 매표소도 보인다. 한국불교대학 도반들과 들러본 동화사 였다.... 2016년에는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기원하며, 늦은 점심 식사 장소인 팔공산 고려 가든으로 길을 제촉해 본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