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동숲과 덕동마을(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180)
덕동숲(명승 제 81호)과 덕동마을
2015. 10. 11.
2015. 10. 6. 오늘은 포항의 북구 용흥동과 기북면. 기계면 지역을 탐방한다...
행복이라는 것은 무언가 좋은 일이 있어서 기분이 좋은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솟아나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행복은 자존심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책임이다.
다른 사람이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도 있겠지만 결국 행복은 당신이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에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햇살 좋은날 나홀로 행복한 나만의 여행길 찾아 오늘도 여기 저기를 기웃거려 본다.
탐방할 문화재와 여행지는 포항시 북구 용흥동 신라 소재상 부인 순절비와 기북면의 덕동 숲과 용계정. 여연당 고택. 애은당 고택. 사우정 고택. 오덕리 근대가옥. 이원동 가옥과 기계면의 봉강재. 분옥정. 봉계 고인돌. 새마을 운동 발상 기념관. 문성 고인돌을 두루 돌아볼 예정이다.....
오늘 첫번째로 소랑부인의 남편 향한 애절한 마음을 생각하며 신라 소재상 부인 순절비를 보고 기계면을 지나 기북면부터 다녀 오기로 하고 두번째 여행지인 기북면 덕동 마을로 향한다...
기계에서 청송방향으로 7분정도 가다가 기북면사무소 쪽으로 우회전 전방 7km소요
기북면 소재지로 향하면서의 풍경이다
덕동마을 거의 다가서의 멋진 돌탑이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다.
덕동마을 앞을 흐르는 용계천
송계 숲.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타리처럼 마을을 보호하고 있다.
아름다운 덕동마을 숲 (명승 제 81호)
덕동마을은 조선의 대유학자인 회재(晦齋)이언적의 동생 농재(聾齋) 이언괄의 4대손인 이강이 경주 양동마을에서 50리 떨어진 이곳에 거처를 정하고 360여년간 대를 이어 살면서 여강이씨 집성촌이 됐다고 한다.
동생 이언괄은 형인 회재 이언적이 관계에 나가면서 어머니 봉양을 위해 이곳에 눌러 앉아 자손 대대로 덕동마을을 문사의 마을로 만들었다.
이 마을은 천혜의 자연조건과 독특한 문화를 높이 평가 받아 1992년 정부로부터 문화부 지정 문화마을로, 2001년에는 환경친화마을로 지정받았다.
이 마을은 조선 중기 여강이씨의 집성촌으로 덕이 있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고 하여 '덕동(德洞)'이라 불리었다.
산림청, 생명의 숲에서 공동으로 실시한 제7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상에 기북면 오덕리 ‘덕동 마을 숲’이 선정되어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인정받았다.
덕동마을의 폐교 자리
덕동마을의 폐교를 헐고 한옥으로 건축한 포항전통문화체험관
포항전통문화체험관은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서당 체험, 서예, 다도 예절, 숲 생태 체험 같은 교육 체험이 있고 난타, 짚풀공예, 한지공예, 천연염색 같은 문화체험도 있다.
이밖에 두부 만들기, 떡 만들기, 김치 담그기 등 음식체험도 가능하다. 단 20인 이상 단체일때 체험 신청이 가능하다.
한옥 온돌방을 비롯해 체험실, 전시관, 식당, 샤워실 등 시설이 깔끔하고 편리하게 갖춰져 있다. 마당에서 투호놀이, 널뛰기를 할 수도 있다.
포항전통문화체험관을 나와 마을로 가본다..
포항전통문화체험관 돌담을 돌면 '도화송'이라는 오래된 소나무 한그루가 나온다.
도화송을 지나 다시 오른쪽 골목길을 들어서면 용계정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용계정 입구의 포사로 용계정의 관리사 이다.
포사로 용계정의 관리사에서 바라본 용계정 쪽이다.
통허교를 지나면 용계정이다.
통허교 지나 용계정 입구에서 바라본 용계정의 관리사 쪽 모습이다.
용계정(명승 제81호_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243호)
용계정은 1546년에 건립된 것으로 임진왜란 때 북평사를 지낸 정문부가 별장으로 사용하던 것으로 후손들이 대를 이어가면서 정자원림을 경영해 왔던 조선시대 대표적인 별서이다.
임진왜란(1592년) 당시 북평사(北評事)를 지낸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 선생의 별장으로 조선 명종(明宗) 원년(1546년)에 건립하였고 숙종 12년(1686년)에 증축하였다.
건물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목조와가(목조와가) 팔작(八作)지붕의 5량(樑)집이다. 방 4칸, 마루 6칸으로 된 누각(樓閣)으로 방위에는 다락이 지붕과 이어져 있으며 마루끝에는 난간을 달았고, 부연(浮椽)과 난간 천장마루의 기법이 훌륭하다.
정문부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 되어 회령의 반란을 진압하고 크게 등용되었으나, 초회왕(楚懷王)에 대해 지은 시로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그 후 신원(伸寃)되어 경성의 창렬사(彰烈祠) 등에 배향되었다.
건물 앞쪽은 계곡의 기암절벽과 마주하고 있으며
용계정의 '사의당' 현판
용계정에서 비라본 용계정 입구쪽...
용계정의 건물 뒤편의 협문은 후원(後苑)에 연결되고
후원에서 바라본 용계정 딋면의 협문쪽
정조 이후에는 세덕사(世德祠)의 부속건물인 강당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고종 5년(1868년) 서원 철폐시에 용계정을 세덕사지와 분리하기 위해 밤새도록 담을 쌓아 세덕사(世德祠)만 철폐되고 용계정(龍溪亭)은 화를 면하였다고 한다.
현재 정문부(鄭文孚)의 손서(孫壻)인 이강(李壃)의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다.
다시 용계정의 뒷면 협문을 들어와서 용계정의 우측면
용계정의 우측면 출입문을 나와서 커다란 은행나무쪽에서 바라 본 용계정...
용계정의 우측면 출입문을 나와서 정자쪽으로 있는 200년된 기북면 보호수 누운향나무 와향
400년이 넘는 은행나무
수백년된 은행나무, 향나무, 백일홍 등이 용계정을 둘러싸고 있다.
덕동마을의 백미는 고즈넉한 연못 호산지당이라고 할수 있겠다...
마을 수구막이 숲으로 조성된 덕동숲과 자연계류 합류대와 잘 어우러진 역사문화 경승지이다.
호산지당 (덕동마을 숲)
연못을 중심으로 조성된 "명상의 길"이 볼만 하다.
"명상의 길"을 천천히 걸어 본다.
"명상의 길"이 끝날즈음에 회나무 우물이 보인다.
과거 마을의 50여 세대가 물동이를 이용하여 생활식수로 사용했다는 자영우물 회정(회나무 우물)
축조연대는 5-350여년 전이라고 한다.
연이어 구령대와 애은당 고택 표시판이 나타난다.
1930년경 덕동사설 학당이 건립되어 1950년 폐교하여 현 생태연못이 20년간 학교 운동장으로 사용되었으며 이 바위는 전교생 조회시 구령을 하던 장소로 운동장이었음을 알리는 유일한 흔적이다.
애운당 고택으로 향해 본다.
오덕리 애운당 고택 (경상북고 민속문화재 제 80호)
북평사(北評事), 전주부윤(全州府尹)을 지낸 바 있고 임진왜란 당시 많은 공을 세운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 선생이 식솔들의 피난처로 사용하다가 임진왜란 후 고향인 진주로 이사하면서 그의 손서인 사의당(四宜堂) 이강(李壃)에게 재산 일체를 양여하였는데 1695년 3월 이강(李壃)의 7남매 자녀 분가시에 4남 이덕소(李德邵)의 분가로 관리해 오다가 현재의 소유주인 이문희의 6대조 이재급(李在伋)이 매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애은당 고택이 위치한 지형은 거북형으로 건물배치를 거북형으로 축조하여 거북 앞발 위치에 각각 별당과 방앗간을 두었고 머리부분에 속하는 앞면에 잠실(蠶室)이 있었으며 꼬리 부분에 화장실이 있다.
정면 사랑채와 붙은 대문을 들어서면 5칸 곡자형(曲字型)의 안채가 자리하며 좌측에는 창고와 방이 딸린 부속사(고채)가 자리하며 전체적으로 ㅁ 자형을 이루고 있다.안채는 정면 4칸반, 측면 3칸반이며,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목조와가이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주택의 평면구성이 ㅁ 자형을 이루고 있어 당시 상류층의 생활상을 나타내주고 있다.
여연당 고택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58호)
이 가옥은 조선 선조 때 북평사(北評事)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가 식솔들의 피난처로 사용하던 집이다.
농포 정문부 선생이 임진왜란 후 손서인 이강(李壃)에게 별옥(別屋) 일체를 양여할 때의 부속건물 중의 일부로서 이강의 둘째아들 이덕령(李德齡)에게 물려주고 현재에 이르고 있고 현 소유자인 이원돌(李源乭)은 이강의 9대손(代孫)이다.
정면 4칸, 측면 6칸의 목조와가인 이 가옥은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조선 중기에 창건한 건물로 당시의 시대상을 잘 나타내주는 주택평면구성이다.
덕계서당
덕계서당 강의재
사우정고택 (경상북고 민속문화재 제 81호)
사우정(四友亭)은 조선 선조 때 북평사(北評事)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가 식솔들의 피난처로 사용하였던 집이다.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 선생의 조부이신 정언각(鄭彦慤)이 청송부사로 재직 당시 지리에 밝은 청지기가 일러준 길지(吉地)로 “활란가거 천하지낙양(活亂可居 天下之洛陽)”이라 불렀다고 전하며, 이로부터 땅을 점유하여 집을 건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방형(方形)의 담장으로 둘러쌓인 바깥마당으로 들어서면 일자형(一字形)의 사랑채가 있고, 대문을 들어서면 ㅁ 자형의 안채가 있으며 우측 담장 모서리에 사당지(祠堂址)가 있다.
당시 지명이 송을곡(松乙谷)이라 불렀는데 임진왜란 당시 왜병이 송(松)자가 든 지명에서는 패전한다는 설이 있어 이곳을 피난지로 삼았다고 전한다.
농포 정문부 선생의 손서인 이강(李壃)에게 양여하였고 이강은 3남 이덕삼(李德三)에게 다시 물려주었으며, 그 후 이헌순(李憲淳)이 그의 호(號)를 따서 사우정(四友亭)을 당호(堂號)로 정했다고 한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목조와가이고, 사랑채는 정면 7칸, 측면 1칸반이 목조와가로 맞배지붕이며 조선중기(1600년대) 상류계층의 생활상을 짐작케 해주는 고택(古宅)이다. 그 후 100년 뒤에 사랑채를 건립했다.
오덕리 근대한옥(국가지정 문화재 제 373호)
오덕리 근대 한옥 (국가지정문화재 제 373호)
1947년 2월에 상량된 전통한옥과 근대한옥의 특징을 갖고 있어 20세기 중엽 사회변화에 따른 민가의 변화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가옥이다.
부재의 결구와 구조수법 등 일반적인 형태는 전통한옥의 특징을 따랐으나 안마당을 중심으로 집약된 배치형식, 제재소에서 규격 생산된 목재 사용, 전후퇴와 측퇴가 발달한 평면구성, 수장공간의 발달 등에서 근대한옥의 특징을 읽을 수 있다
근대화 한옥을 나선다.
덕계서당. 여연당 고택. 사우정 고택이 한눈에 보인다.
여연당 고택. 사우정 고택이 담장을 사이에 두고 정답게 앉아 있다.
팔봉공의 옛집터
다시 동네를 한바퀴 돌아
애운당 고택 앞을 지나
용계정 후원을 지나
덕동 민속 전시관쪽으로 향한다.
덕연구곡 시비
용계정 관리사 뒤쪽을 지나
이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과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용계정 옆에 세워진 민속전시관 입구에 들어서면 우리나라에서 단 2개 보존돼 있다는 독(과학 단지)이 눈길을 끈다.
덕동 민속전시관은 여강이씨 11대조 이동진(84세) 관장님이 관리하고 계시며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고서적을 기증하여 행정안전부로 부터 '제4호 기록사랑' 마을로 지정되었다.
다시 포항전통문화체험관을 지나
도화송도 지나고...
아름다운 덕동마을 숲과 마을 앞을 흐르는 용계천도 지나서 덕동마을 빠져나와 기계면 봉강재로 향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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