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사적비와 송시열 사적비 그리고 오래된 은행나무(포항시 장기면 마현리 331)
다산 정약용 사적비와 송시열 사적비 그리고 오래된 은행나무
2015. 10. 9.
2015. 10. 2. 오늘은 포항의 남구 장기면 지역을 탐방한다...
여행은 길 위의 움직이는 학교이다.
운명과도 같은 새로운 만남과 사람과 삶을 배운다. 서로 사랑하는 법, 감동을 나누는 법을 배운다. 나를 용서하는 법, 화해하는 법도 배운다. 인생을 새롭게 설계하는 기술을 배우고 진정한 기쁨과 행복도 배운다.
또한 지나온 자신을 돌아보며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여행을 떠난다. 삶의 중간에서..
이런 햇살 좋은날 나홀로 행복한 나만의 포항 남구 장기면 일대 문화탐방을 나선다.
탐방할 문화재와 여행지는 포항시 남구 장기면 정천리 선정비와 대곡리 김해김씨 열녀비, 학곡리 학삼서원, 장기읍성, 장기향교, 장기면사무소 안에 있는 척화비, 근민당, 선정비, 금곡리 금산서원과 삼효각. 허진수 유허비, 계원2리 화재 이언적 시비, 양포리 정인품 절효각, 수성리 정유서 유록 유허비, 임중리 김사민 종효각, 장기초등학교 교정의 송시열. 정약용 사적비와 은행나무, 마현리 삼명서원을 두루 돌아볼 예정이다.....
열번째 여행지인 포항시 남구 장기면 수성리 371-2번지에 위치한 정유서 유록 유허비와 포항시 남구 장기면 임중리 114번지에 위치한 김사민 정효각을 만난 후 장기들판을 가로 질러 열한번째로 장기초등학교 안에 있는 다산 정약용 사적비와 송시열 사적비 그리고 오래된 은행나무를 만나러 가본다...
우암 송시열 선생과 다산 정약용 선생이 장기에 오신 것은 장기인들에게는 최고 수준의 학문을 전수받을 수 있는 행운이었다.
이 분들이 이 고장에 끼친 음덕에 대해 오랫동안 장기인들의 마을속에 항상 잊지 않고 있으며 그 고매한 정신을 이어 받고 또한 후세들에게 이어가게 하기 위하여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과 장기발전연회의 발의에 힘입어 포항시의 지원과 기금으로 이 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우암 송시열. 다산 정약용 선생 사적비 건립 추진 경위비가 세워져 있다..
우암 송시열 선생 사적비(尤庵 宋時烈 先生 事蹟碑)의 정면
우암 사적비 남쪽면
우암 송시열 선생은 17세기 국정운영의 중책을 맡았던 실력자요 국노(國老)로서 한국 역사속에 우뚝 선 거목이다. 선생은 노론(老論)의 영수(領袖)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전심전력을 경주했던 성리학자이면서 정치가이기도 했다.
남인(南人)의 집권과 동시에 조정에서 실각하여 덕원(德源)에 유배되었다가 조선조 숙종 원년인 1675년(우암 선생 69세) 윤5월에 이곳 장기현에 옮겨와 6월11일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어 4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였다.
우암 사적비 뒷면 (서쪽면)
숙종 5년 1679년(우암 선생 73세) 4월10일에 그동안 정착했던 사관(舍館)안에 홀연히 자생한 느티나무를 베어 지팡이를 만들어 짚고 죽교(竹轎)에 올라 거제도로 이배되어 장기를 떠났다.
우암이 장기에 유배올 때 동생 시도(時燾), 시걸(時杰)과 부실(副室) 및 노복(奴僕)들을 대동했으며, 도착 즉시 마산촌에 붕실(鵬室)을 정했다. 나중에는 아들 기태(基泰)와 손자 주석(疇錫) 그리고 증손 일원(一源)과 유원(有源)도 합류하여 함께 생활하였다.
당시 마산촌 주인은 사인(士人) 오도전(吳道全)이었는데 4년 동안 우암에게 수학하여 향교의 훈장이 되었고, 서유원(徐惟遠) 역시 끝까지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여 훈도를 받았으며, 장기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은행나무도 우암이 심었다고 알려져 있을 만큼 그 영향력은 막강했다.
우암이 장기를 떠난 후 29년 되는 해에 죽림서원(竹林書院) 창건이 논의 되었고 이를 주도한 오도종(吳道宗), 이석증(李碩增), 황보 헌, 이동철(李東哲), 한시유(韓是愈) 등의 사인들과, 우암의 장기 유배생활에 대한 실상을 후세에 기록으로 전해준 김연(金璉), 오도징(吳道徵), 이유(李瑜), 오시좌(吳時佐), 민종대(閔宗大) 등도 기억되어야 할 분들이다. 그러나 죽림서원은 아쉽게도 우여곡절 끝에 지금 폐허화되어 무심한 죽림만 우거져 있다.
우암 사적비 북쪽면
우암이 장기에 귀양온 것은 우암에게는 불행인지 모르지만, 당시의 장기와 장기인들에게는 행운이었다. 이 무렵 장기인들은 우암을 통하여 유학의 진수와 우암인맥이 형성되었으며 아울러 궁벽한 해곡(海曲)이 예절을 숭상하는 유향(儒鄕)이 되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우암은 장기에서 [주자대천차이(朱子大全箚肄)]와 [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 등의 명저를 저술했고 취성도(聚星圖)를 완성했으며, 정포은 선생 신도비문(鄭圃隱先生神道碑文)을 비롯한 많은 양의 시문(詩文)도 창작했다.
유배기간 중 우암을 뵙기 위해 조야상하(朝野上下)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우리 고장을 방문했다. 특히 명제(明齊) 윤증(尹拯)과 장기에서의 만남은 노론(老論), 소론(少論) 분당의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으로 장기에 체류중 부인 이씨의 상을 당하여 멀리서 통곡했으며, 장녀의 부음(訃音)을 듣고 애통해 하기도 했다.
우암이 우리 고장에 끼친 음덕에 대해서 오랫동안 장기인들은 잊지 않고 있었지만 가시적인 기념물 하나도 지금까지 만들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같은 정황을 감안하여 장기발전연구회에서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의 격려와 협조에 힘입어 우암선생의 사적비를 세웠다.
다산 정약용 선생 사적비(茶山 丁若鏞 先生 事蹟碑)
선생의 자(字)는 미용(美庸), 호(號)는 다산(茶山), 본관(本貫)은 나주(羅州)로 조선 영조 38년(1762년) 6월16일에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馬峴)에서 태어났다.
부(父)는 진주목사를 지낸 재원이며, 모(母)는 해남윤씨(海南尹氏)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6세손이자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손녀이다.
선생은 15세 때에 풍천홍씨(豊川洪氏)를 아내로 맞아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으며 헌종(憲宗) 2년(1 836년) 2월 22일에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조선후기 실학의 집대성자이자 정의를 실천한 사상가이며 행정가이다.
22세에 경의진사(經義進士)가 되고, 28세에 문과에 급제함으로서 호학군주(好學君主)인 정조대왕(正祖大王)에게 발탁되어 군왕의 측근문신으로 애민지정(愛民之政)을 실천하게 된다. 일찍부터 학문의 실용성과 현실참여를 중시하는 실학의 학풍을 숭상하여 배우고 익혀온 선생은 서학(西學)의 수용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정조대왕의 승하 후 붕당질서에 기인하여 일게 된 서학 관련 천주교도에 대한 신유년 대옥사로 선생의 형인 약종(若鐘)은 참형에, 약전(若銓)은 전라도 신지도(薪智島)로 선생은 이곳 경상도 장기고을 마현(馬峴)으로 각각 유배되는 참화를 입게 되니, 선생의 마현땅 도착이 신유년(辛酉年 : 1 801년) 삼월 초아흐레이다.
마현방 성선봉(馬峴坊 成善封)의 집을 배소(配所)로 하여 유배의 삶을 해가던 선생은 장형(長兄) 약현(若鉉)의 사위인 황사영(黃嗣永)이 작성한 백서사건(帛書事件) 관련 의혹으로 시월 스무날에 서울로 압송된다. 그 사이 이백 이십여일간을 장기에 머물면서 장기고을 백성들의 생활상과 고을 관리들의 목민행태(牧民行態)를 글로써 남기게 되었으니, 장기농가십장(農歌十章)과 기성잡시 27수, 아가사(兒哥詞), 해랑행(海狼行), 오적어행(烏賊魚行), 타맥행(打麥行) 등 백삼시여수의 시작(詩作)이 그렇게 토속적이고 사실적이며 비판적이면서도 은유적일 수 가 없다. 그 밖에도 이아술(爾雅述), 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 등의 서책도 저술하였으나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의금부에서의 추국(推鞫)을 마친 다음 선생은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이배(移配)되어 순조(純祖) 18년(1818년) 9월 2일의 해배시(解配時)까지 17여년의 긴 세월을 학문연구에 헌신한다.
선생이 일생동안 남긴 오백여편의 저술과 이천여수의 시작(詩作)은 현실참여와 유배의 만고를 감내하며 온양해온 애민과 선의지(善意志)의 결정(結晶)이 된다.
"시대적 어려움을 떨쳐낼 사상가로서 바름을 실천한 표상적 지식인으로서 참여와 서정을 적절히 묘합(妙合)해 낸 비판적 문학가로서 정성다해 살다간 선생의 혼백이 우리 고을 장기에 남아 후세를 경계하니 장기고을 예민(裔民)들이 인의와 예지신을 어찌 외면 하오리오. 선생이 떠나신지 이백이 되는 해에 장기고을 사람들이 흠모의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우니 선생의 숭고한 정신이 더욱 깊이 활착하여 온 강토에 널리 만영(滿盈)하기를 바란다."
또 은행나무는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께서 1675년 6월에 우리고을에 유배되어 오셔서 이 자리에 서당을 세워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이 나무를 심으셨다고 하며, 1679년 4월에 거제로 거처를 옮기셨다고 한다.
이 나무의 나이는 330살 정도로 추정된다.
장기초등학교 교정의 모습들...
열한번째로 장기초등학교 안에 있는 다산 정약용 사적비와 송시열 사적비 그리고 330년된 은행나무도 만난 후 오늘 일정의 마지막인 열두번째로 포항시 남구 장기면 마현리 58번지에 위치한 삼명서원을 만나러 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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