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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忠)과 의(義)로 가득찬 고택, 충의당 (경북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492번지)

꽃돼지. 2015. 7. 1. 17:19

충(忠)과 의(義)로 가득찬 고택, 충의당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99호 )     

  

 

 

 

 

 

 

2015.   7.  1.

 

 

2015.  6.   28.   오늘도 경주 문화재 탐방은 계속된다... 

 

살아있어 숨소리에  감사하며 커다란 머그잔에 담긴 커피 향처럼 그 향기로운 아침이 행복하다

 

오늘은 내남지구를 중심으로 탐방할까 한다..

순례할 문화재는 경주  내남의 경덕왕릉 가다가 만난 최포공 효자비를 보고 경덕왕릉,  용산리 서원,안심리 암각화와 충의당을 보고 인근의좀 떨어진 곳에 위치한 희강왕릉. 민애왕릉을   두루 돌아볼 예정이다.....

 

다섯번째 일정으로 경주시 내남면 안심리 암각화를  보고  경북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492번지에 위치한 충의당을  보러 간다...

 

 

작지만 깊은 뜻을 품고 있는 고택,  수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아름다운 의무가 시작된 공간,  그리고 여전히 살아 숨쉬는 집,  충의당 (忠義堂) 으로 여행이 시작된다..

 

 

 

 

 

 

 

 

충의당(忠義堂) 입구라고 큰 표지석이 반가이 맞이하고 있다.

 

 

 

 

 

 

 

인조대왕어필제문(仁祖大王御筆祭文)이 충의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크게 새겨져 있다 .

 

 

 

 

 

 

 

 

 

 

 

 

 

 

 

 

 

 

 

이곳 충의당을 찾은 이유는 이곳이 바로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논할때 첫손에 꼽히곤하는 경주 최부자집의 원류가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경주 최부자의 제1대이신 정무공 최진립(貞武公 崔震立(1568~1636))장군이 나고 살았다는 

고택이 바로 이 충의당이다.

원래 이름은 공경하고 또 공경한다는 흠흠당(欽欽堂)이었으나 1760년 중건하면서 충의당으로 이름이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원래 그 주인이었던 최진립 장군의 인품을 닮아서인지 고택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 볼때 위압적이지 않고 또 화려하지 않음이 인상적이다.

 

 

 

 

 

 

 

 

 

 

 

 

 

 

 

한 틀(셋트)을 보기 드문 연자방아 돌인데 다른 곳에서 옮겨 온 것으로 짐작이 되지만 우리 조상들의 슬기로움이 이 받침돌의 경사면과 굴림돌의 안쪽으로의 경사각이  축을 중심으로 맞물려 돌아가야만 힘이 적게 들면서 곡식을 잘 찌을 수 있다고 한다 .

 

 

 

 

 

 

현재 경주 교동에 있는 최씨 고택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살았던 최진립 장군과 그의 후손들은 그런 집의 기품과도 닮아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지금은 후손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관리하고 있고 또 한옥스테이도 하고 있다지만​ 내 나름대로는 이곳에서 최진립 장군을 생각해보고 또 그의 가풍을 느껴보려 노력했다

 

 

 

 

 

 

 

 

충의당 이라는 대형 현판 옆에는 충의당 기문이 있는데 면암 최익현이 이 곳에 직접 와서 쓴 것이라고 한다.

 

 

 

 

 

 

 

 

 

 

 

 

깨끗하게 잘 정비된 화단과 고택의 편안함같은 그 분위기 때문인지 마음이 편안하다.

 

 

 

 

 

 

 

 

 

 

 

 

충의당 한편 오른쪽에는 최진립 장군을 모신 사당이 있다. 그 이름이 충렬사 였다.

 

 

 

 

 

잠와를 기리는 사당 충렬사

 

 

 

 

 

 

 

 

 

 

 

 

 

충의당 입구에서 바라 본 충의당 전경이다...

 

 

 

 

 

 

 

기와담 사이의 문양들. 귀면(鬼面),  천년(千年)의 미소.......

 

 

 

잠와고택 경모각

 

 

 

 

 

 

 

 

 

 

 

 

다실로 사용되고 있는 경모각

 

 

 

 

 

 

경모각 우측으로는 오래된 살구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안마당에서 발라본 경모각

 

 

 

 

 

 

 

경모각과 나란히 일자 형태로 자리한 충의당

 

 

 

 

이 집은 정무공 최진립(1568 - 1636) 장군이 기거하시던 사랑채에 해당되는 곳으로 처음에는 당호를 흠흠당(欽欽堂)이라고 하였으나 1760년 경 중수를 하고 난 뒤에 충의당(忠義堂)으로 고쳤다고 한다.

 

 

 

종가의 사랑채 충의당(忠義堂)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 소재해 있는 최 부잣집의 파시조(派始祖) 최진립이 살았던 "충의당(忠義堂)" 

잠와고택 사랑채

 

 

 

 

 

 

충의당은 앞면이 4칸이고 옆면은 2칸으로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오른 쪽 2칸은 마루로 하였다.

 

 

 

 

 

 

 

 

 

 

 

 

사랑채 앞에는 장군의 6대조인 사성공(司成公) 최예(崔汭)의 사당 표지석으로 보이는 대형 석물 한 점이 출토되어 놓여 있다.   이곳이 사당이 있었다는 사실과 아들 3형제의 이름자가 적혀 있다.

 

 

 

 

 

 

 

 

안마당에서 바라본 충의당의  뒷모습

 

 

 

 

 

 

 

 

 

 

 

 

 

충의당의 왼쪽 2칸은 온돌방을 데우기 위한 온돌 아궁이

 

 

 

 

 

 

 

 

 

 

 

 

 

 

평소에는 삼문으로 출입을 하지 않고 평소에 일반인들이 드나드는 작은 대문이다.

 

 

 

 

 

 

 

 

 

 

 

 

 

충의당 들어가서 왼쪽으로 뒷간 뒤로 보이는 '청백리정무공최선생기념관' 이다

 

 

 

 

 

 

 

 

 

 

 

'청백리정무공최선생기념관' 은 문이 잠겨져 있어 아쉽게도 볼수가 없었다..

 

 

 

 

 

 

 

 

 

 

 

 

 

 

 

 

 

 

평소에는 삼문으로 출입을 하지 않고 평소에 일반인들이 드나드는 작은 대문 밖에서 바라본 '청백리정무공최선생기념관' 이다..

 

 

 

 

 

 

 

 

 

 

마당 한켠에 자리한 민속자료실이다.

 

 

 

 

 

 

 

 

 

 

 

 

 

 

 

 

 

흠흠당 마주보고 있는 '우산초려'

 

 

 

 

 

 

 

 

 

우산초려와 마주보고 있는 흠흠당

 

 

 

 

 

 

 

 

 

 

 

 

행랑채 흠흠당에 걸려있는 멋진 글씨의 현판과 안뜰에 둘러쳐진 담장.

 

현판의 글은 중용(中庸)의 신사명변(愼思明辨)을 인용하였다.  - "신중하게 생각하고 명확하게 판단하라" 

 

 

 

 

 

 

흠흠당의 뒷쪽 모습이다..여기는  사당이 바로 보인다.

 

 

 

잠와고택 안채

 

 

 

 

 

 

 

 

 

 

 

 

잠와고택 안마당 전경

 

 

 

 

 

 

 

 

 

 

 

 

안마당 흠흠당 앞에서 바라 본 안마당과 연결된 왼쪽은 경모각,   오른쪽은 충의당 이다..

 

 

 

 

 

 

 

 

 

 

 

 

최진립 장군은 용맹한 장군이고 최부자집 제1대로 유명하지만..

그 스스로는 청백리로  녹선된 청렴한 사람이었고 엄밀히 말해 부자로 꼽힐 사람은 아니었다.  최부자 12대가 진정으로 만석군 부자로 거듭나게 된것은 최진립 장군의 손자인 3대 최국선부터 였다.

 

 

 

 

 

 

 

 

 

 

 

 

일반적으로 " 경주 최 부잣집"하면 세상에 널리 알려진대로 경주 교동에 소재해 있는 "교촌댁"을 일컫는다.  그러나 최 부잣집의 집안 내력을 사전에 인지하게 되면,   경주 내남면 이조리에 위치한 "충의당(忠義堂)"을 먼저 찾아오는 일에 망설임이 없다.

 

 

 

 

 

 

경주 최 부자는 최치원의 17세 손인 최진립과 그 아들 최동량이 터전을 이루고 손자인 재경 최국선으로부터 28세 손인 문파 최준에 이르는 10대 약 300년 동안 부를 누린 일가를 일컫는 말이다.

엄청난 재산을 오랫동안 간직해 온 경주 최 부자의 가문을 일으킨 사람은 바로 마지막 최 부자 최준의 11대조인 정무공 최진립 장군이다.

 

 

 

 

 

 

 

경주 최씨 사성공파의 한 갈래인 가암파의 시조인 최진립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왜적과 싸우고 나중에 무과에 급제한 뒤 정유재란 때 다시 참전했다. 그 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전선에서 적군과 싸우다가 순국하니 그의 나이 예순아홉 이었다.  평소의 생활도 청렴하였던 최진립은  이렇듯 일생을 장렬하게 마쳤다.

 

 

 

 

 

 

 

충의당 밖에서 바라본 사당

 

 

 

 

 

 

안채의 후원

 

 

 

 

 

 

 

 

 

 

 

후원에서 나가는 작은 문 이다..

 

 

 

 

 

 

 

정무공 최진립이 심어 최부자집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회화나무가 하늘 높이 서 있다

 

 

 

 

 

 

1982년에 지정된게 400년 이었으므로 지금은 433년이나 된 고목이다.

정무공 최진립 장군이 손수 심었다고 하는데 6.25때 고사하였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나무이기도 하다.

 

 

 

 

 

 

이 나무는 1986년 11세손 영안 이라는 분이 성력을 기울여 주위의 환경을 정화하셨으며  1997년에는 나무의 수세가 약해서 경주시에서 양생을 하였다고 한다. 

 

 

 

 

 

 

 

 

 

 

 

 

 

 

 

 

 

 

 

 

 

 

 

 

노거수 건너편에 있는 충노각과 표지석이다,

충노각이란 충성스러웠던 최진립 장군의 사노인 옥동과 기별 두 사람을 기리는 비이다.

 

 

 

 

 

충노각의 표지석에 쓰인 구절을 풀어보면 이와 같다.

 

 

 

 

 

주위충신 불위충노호(主爲忠臣 不爲忠奴乎)-주인이 충신인데 충성스런 노비가 되지 못하겠느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충성을 다한 충장이자 청백리이며 명가를 이룬 경주 최부자집의 제1대인 정무공 최진립 장군과 특별한 두 사노인 옥동과 기별.

이들을 이곳에서 알게 되고 만나게 되었으니 충의당이 더욱 특별하게 보인다.​

 

 

 

 

 

 

 

 

 

 

 

 

 

 

 

 

 

 

 

충노 옥동. 기별 불망비

 

 

최진립 장군의 충노 두사람은 최진립 장군의 후손들로 부터 추앙을 받고 있었다..

 

 

 

 

 

비석의 앞면에는 이런   글이 있다

 

 

 

 

 

 

 

충의당 밖에는 정무공 최진립 장군을 기리는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또 최진립 장군의 동상이  후손들에 의해 제작 되어 있었다.

 

 

 

 

 

 

최진립 장군의 동상 하단에 있는 이 부조상의 주인공은 옥동과 기별, 최진립 장군의 사노(私奴)였던 사람이다.

이들은 1636년 칠순​ 노장인 최진립 장군을 수행하여 험천 전투에서 그 주인을 지키고자 충성을 다하며 끝까지 분전하다 그들의 주인과 함께 전사했다. 이들은 주인이었던 최진립 장군의 후손들에게 제사를 받는 특별한 사람들이다

 

 

 

 

 

 

 

 

 

 

 

 

 

 

 

 

 

 

 

 

 

 

 

 

활을 쏘는 최진립 장군의 기마상에서 임진왜란때 창의한 의병장으로서 활약하고 칠순을 앞둔 노장이었지만 병자호란때 출정하여 용인 험천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던 그의 용맹과 충성심, 기개가 그대로 느껴진다.

 

 

 

 

 

 

 

 

 

 

 

험천전투에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최진립 장군이 그간 그를 수행했던 사노 옥동과 기별에게 자신은 싸우다 죽어야겠지만 그대들은 그러지 않아도 되니 돌아가라 하자 두 사노가 최진립 장군에게 한 말이라 한다

 

 

 

 

 

 

과연 그 주인에 그 노비라.

옥동과 기별, 두 사노 또한 그 의기와 충성됨이 주인인 최진립 장군에 못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사노인 노비는 국방의 의무가 없다.  따라서 그들이 전장에 나갈 이유도 없고 싸워 죽을 이유나 의무도 당연히 없다.   오직 주인에 대한 도리만이 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 그들이 함께 죽어야할 이유가 된다는 말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평소 옥동과 기별이 최진립 장군과 그 일가로 부터 평소 노비가 아닌 그 어떤 인간적인 또는 후한 대접,  은혜를 받았고 그 주인된 최진립 장군에 대한 특별한 존경심과 신뢰가 있었기에 두 사노가 이런 용기 있는 행동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충의당과 충의당 밖의 충의 역사문화 공원을 보고 마을 뒷편 인근의 정무공의 비각으로 향한다..

 

 

 

 

 

 

충의 비각이다..

 

 

 

 

 

 

 

 

 

 

 

 

 

 

 

 

 

 

 

 

 

 

 

 

 

 

 

 

 

 

인조 15년 1637년 정려를 명받고 숙종 14년 1688년 정려비를 세우고 숙종 33년 1707년 정려각을 건립 하였다.  비문은 1640년 대사간 만랑 황호가 지었다. 본래의 현판은 충의당 내 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정려비각 뒤의 작은 산봉오리

 

 

 

 

 

 

정려비각 주위 풍경이다..

 

 

 

 

 

 

 

 

최진립 장군은 용맹한 장군이고 최부자집 제1대로 유명하지만...

현재 경주 교동에 있는 최씨 고택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최진립 장군이 이곳에서 살았던 충의당을 중심으로 이곳을 돌아 보며 많은것을 생각할수 있었던 충의당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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