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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정지

꽃돼지. 2015. 6. 20. 23:24

경주 포석정지 (사적 1호)

    

   

2015.   6.  20.

 

 

2015.  6.   19.   오늘도 경주 문화재 탐방은 계속된다... 

 

살아있어 숨소리에  감사하며 커다란 머그잔에 담긴 커피 향처럼 그 향기로운 아침이 행복하다

 

오늘은 포석정지를 중심으로 경주 배동과 탑동을 중심으로 탐방할까 한다..

순례할 문화재는 경주  탑동의 포석정과 지마왕릉을 보고 인근의 양산재와 월암재를 본후 남간사지 석정. 경덕사. 신라 왕릉인 일성왕릉,  남간사지 당간지주, 창림사지 삼층석탑, 김호장군 고택을   두루 돌아볼 예정이다.....

 

첫번째 일정으로 경주시 배동 454-3번지에 위치한 포석정지로 향한다..

 

 

 

 

 

포석정 입구의 풍경이다..

 

 

 

 

포석정 입구에서 바라본 남산은 길게 횡으로 누워 있다..

 

 

 

 

포석정 주차장 주차 요금소가 멀리 보인다..

 

 

 

 

포석정 주차장 좌측으로 마을길이 있는데...

 

 

 

 

 

 

 

 

 

 

왼쪽 마을 입구는 주차 무료

 

 

 

 

 

 

 

 

 

 

 

넓은  주차장을 지나..

 

 

 

 

 

매표소 오른쪽의 매점이다..

 

 

 

 

포석정 출입문

 

 

 

 

입장료 1,000원을 내고...

 

 

 

 

출입문 옆 포석정지 안내도와 안내문

 

 

 

 

포석정지로 명칭이 변경 되었다

 

 

 

 

 

 

 

포석정지로 들어가 본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송림들이 우거져 있다

 

 

 

 

 

 

 

포석정 곳곳에 이런 기둥터와 큰 돌들이..

 

 

 

 

 

 

 

경주시 배동 454-3번지에 위치한 경주 포석정지는  신라의 이궁터로 신라 49대 헌강왕 때 어무상심이란 신라춤이 생겨난 곳이며 화랑들이 남자다운 기상을 배우던 장소이기도 하다.

지금 남아 있는 돌로 된 물길은 22m, 높낮이 차가 5.9m이다.  근래 실험으로 물을 흐르게 한 뒤 두개의 잔에 2/3정도 술을 담아 띄워 본 결과 작은 잔은 10분 30초,  큰 잔은 8분이 걸려서 수로를 흘렀다. 이 정도면 시 한 수를 지어 읊을만한 시간이 된다.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에 의해 최후를 마친 장소이기도 하다.

 

 

 

 

아주 고즈녁한 나무 옆에 포석정지가 자리잡고 있다

 

 

 

 

화강석으로 먼든 수구를 따라 잔을 띄우며 시를 읊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신라인들의 풍류와 기상을 엿볼수 있는 포석정지

 

 

 

 

통일신라시대에 역대 왕들이 연회를 즐기던 곳이다.   통일신라 말기에 신라의 경애왕이 이곳에서 대신들과 연회를 벌이다가 기습해온 견훤에게 잡혀 죽음을 당한 곳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돌로 된 수로가 남아 있는데,   여기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원래는 남산 계곡에서 물이 흘러 내려오는 곳에 돌거북이 있었고,  그 입으로 물이 나오도록 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주위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인공의 기술이 조화롭게 합쳐진 곳으로,   신라의 궁원기술과 당시 사람들의 풍류를 엿볼 수 있다.

 

 

 

 

“포석정에서 어무상심무를 춘 헌강왕”

 

<삼국유사>의 처용랑 망해사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라 49대 헌강왕(재위 875~885)이 포석정에 행차해 연회를 즐기고 있을 때,   갑자기 남산의 신이 왕 앞에 나타나서 춤을 추었다.   하지만 이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왕에게만 보였기 때문에,   왕은 그 모습을 따라 춤을 추어 보였다.   왕이 산신을 따라 춤을 추었다고 하여 ‘어무산신(御舞山神)’   또는 ‘어무상심(御舞祥審)’,   ‘상심무(祥審舞)’라 불렀으며,  이후 신라의 춤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한다.

 

 

 

 

 

 

 

경주 남산 서쪽 계곡에 있는 신라시대 연회장소로,   젊은 화랑들이 풍류를 즐기며 기상을 배우던 곳이다.  

 

중국의 명필 왕희지는 친구들과 함께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읊어야 하며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 3잔을 마시는 잔치인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였는데,  포석정은 이를 본따서 만들었다.

만들어진 때는 확실하지 않으나 통일신라시대로 보이며 현재 정자는 없고 풍류를 즐기던 물길만이 남아있다.   물길은 22m이며 높낮이의 차가 5.9㎝이다.   좌우로 꺾어지거나 굽이치게 한 구조에서 나타나는 물길의 오묘한 흐름은,   뱅뱅돌기도 하고 물의 양이나 띄우는 잔의 형태,  잔 속에 담긴 술의 양에 따라 잔이 흐르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고 한다.  

유상곡수연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있었으나,  오늘날 그 자취가 남아있는 곳은 경주 포석정 뿐으로, 당시 사람들의 풍류와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다.

 

 

 

 

 

 

 

앞서 언급한 경애왕이 포석정에 행차한 것은 음력으로 11월(양력으로 12월) 그때 동짓달이라는 추운 겨울에 흐르는 물에 잔을 띄우는 술잔치를 벌였을지 의문이다.

옛날에는 지금보다 더 추웠을 테니... 문고리가 얼어서 손에 달라붙을 지경으로 옛날의 추위는 무척이나 매서웠다...

그리고 이미 9월에 견훤이 영천까지 칩입하였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로 인해 왕건에게 도움을 청해 둔 상태였다.  영천에서 경주는 40km미만이므로 지척이라고 표현해야 할 거리인데 가까이에 적이 있는 줄을 알면서 술잔치나 벌이다니 가능할까?

 

 

 

 

 

 

 

포석정지 주변의 고사한 노목조차도 운치 있다..

 

 

 

 

또 경애왕이 견훤에게 자진을 당한 뒤 신라의 반응은,  시신을 서당에 모시고 경순왕과 신하들이 슬피 통곡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가 단순히 술잔치를 벌였다면 인심을 잃은 왕이었다면  과연 신하들이 후히 장사를 지냈을까?

이렇게 우리는 승자의 입장에서 본 역사를 고려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을 보고 알고 있는 것이다.

 

 

 

 

 

여러가지 기록을 종합해 보면,

포석정은 돌을 다듬어 포어의 형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포석정이라고 지었으며 포석정이 지금보다 더 넓고 큰 규모였을 것이라고 하며  단순히 유희를 즐기던 곳이 아니라 제사 등 국가적 주요행사를 담당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포석정 앞 우물

 

 

 

 

원래 뒷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 토하는 돌거북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으며, 이 물을 받는 원형 석조(石槽)가 있어 이곳에서  구불구불한 모양의 곡석(曲石)이 타원 모양으로 되돌아오게 되는데, 배수구의 마무리가 분명하지 않다.

 오랜 세월을 거쳐온데다가 일제강점기에 임의로 보수하여 수로곡석(水路曲石)의 원형이 많이 파손되었다.  이러한 석구는 중국 동진(東晉) 시대부터 있었다 하나 대개 자연의 산수(山水)를 배경으로 이루어진 데 비하여,   완전히 인공적인 점이 그 특색이다.

 

 

 

 

 

오랜 세월을 말해주는 고목

 

 

 

 

 

 

 

윤국병 역사학자는, 포석정 옆에 포석계곡에 포석사에서 제사를 지내기전  몸을 씻던 바위웅덩이가 있는 것으로 봐서 포석정에서 제사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파악된다고 주장하였다.

 

 

 

 

역사는 강한 사람의 기록이라고 하던가?

패한 자는 말이 없고,   패한 자의 기록은 이긴 자가 기록을 한다.  그런 기록이 객관적으로 쓸리는 만무하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일본의 침략을 장기간 당했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는 왜곡될대로 왜곡이 되었고, 해방후에는 우리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하여 왔기 때문에 진정한 우리의 모습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석조구조물 수로를 지나 계곡위의 돌다리를 지나 더깊은 포석정지로 들어가 본다..

 

 

 

 

 

 

 

온통 울창한 녹음길이다...

 

 

 

 

 

 

 

아까 건넌 돌다리 아래로 연결된 계곡이다..

 

 

 

 

 

 

 

계곡 돌담을 올라서니  대나무 숲이 포석정지 경계를 이룬다.

 

 

 

 

 

 

 

 

 

 

 

 

 

고운 오솔길을 한바퀴 돌아 나오니...

 

 

 

 

 

 

 

송림 밑으로 옥잠화가 무리지어 자라고 있다..

 

 

 

 

옥잠화 터널도 지나니...

 

 

 

 

 

 

 

 

 

 

 

 

 

포석정지의 울창한 소나무 숲이 눈앞에 펼쳐지고...

 

 

 

 

 

 

 

수학여행 때 빠지지 않고 들르는 곳 중 하나가 포석정.

우리의 머릿속에는 단지 왕실의 놀이터로 경애왕이 후백제군이 쳐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유흥을 즐기다 자결한 암울한 곳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경애왕이 포석정에 간 시기가 동짓날이라는 점,  후백제군이 쳐들어올 거라는 것을 알고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해 놓았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경애왕이 유흥을 즐기다가 나라를 망쳤다는 사실은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경애왕이 긴박한 상황에서 구국기원제(救國祈願祭)를 올리기 위해,  혹은 의지할 곳을 잃고 마지막 피난처로 이 곳을 찾았을 거라는 것이다.

 

 

 

 

 

 

 

 

 

 

포석정은 단순히 유흥을 즐기는 놀이터가 아니라 신라시대 가장 아름다운 이궁지였고 남산신에게 제사를 지낸 국가적으로 주요한 장소였다는 최근 연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포석정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부정적 공간이 아니라 신라의 종말을 고한 안타까운 공간으로 간주함이 옳을 듯하다.

 

 

 

 

 

 

 

지금의 포석정은 화려하거나 아름다움을 찾아보기 어려워 대개 비싼 주창요금과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실망하기 쉽다.

포석정은 원래 중국의 명필 왕희지가 친구들과 함께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읊어야 하며 시를 짓지 못하면 벌로 술 3잔을 마시는 잔치인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본 따서 만들었다 하나 중국에서 조차 유상곡수연 유적이 거의 없어 문화재로서 가치가 충분하다 할 수 있다.

 

 

 

 

 

 

 

 

 

 

 

 

 

신라의 태동을 알리는 나정과 신라의 종말의 공간인 포석정이 불과 몇 백 미터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신라의 시작과 끝이 한자리에 있으니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포석정 주차장을 가로 질러 나오면서 좌측 지마왕릉 표지판을 따라 지마왕릉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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