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산사 (甘山寺)- 경북 경주시 외동읍
감산사 (甘山寺) 2015. 5. 14. 2015. 5. 11. 나 혼자만의 신라 왕릉 순례길에 오른다......... 08:45 포항을 출발....
맑은 아침의 공기가 향내음 처럼 싱그럽다.... 룰루랄라 CD음악 크게 틀고 경주 왕릉길 순례 나서는 기분이 참으로 상쾌하다. 오늘 순례할 왕릉은 외동쪽 방향의 왕릉으로 원성왕릉, 원성왕릉 부근의 수봉정. 감산사지 삼층석탑. 감산사와 효소왕릉, 성덕왕릉, 신무왕릉, 효공왕릉, 신문왕릉, 선덕왕릉 등 왕릉 7군데와 문화재 2곳, 사찰 1곳을 돌아 볼 예정이다..
세번째 여행지는 원성왕릉 순례 후 원성왕릉 입구에 붙은 표지판을 보고 감산사지 삼층석탑 찾아가다가 우연히 들러 수봉정을 본 후 감산사지로 간다....이곳 역시 길은 넓지 않았다.
마치 신라의 귀족들이 살것 같은 전원주택을 지나고 나면 괘릉리 마을의 끝부분에 자리하고 있는 감산사는 작지만 앙증맞은 절집이었다...
지금의 감산사는 옛절터위에 다시 세운 것이다. 경주 감산사는 비구니 도량으로 이제는 절을 제법 크게 꾸며 놓아서, 더 이상 감산사지가 아니다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6-2번지에 위치한 감산사는 신라의 중아찬(重阿飡) 김지성(金志誠)이 감산에 있는 장전(莊田)을 희사하여 부모의 명복과 성덕왕(聖德王)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하여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는다.
1915년경에 이 절터에서 석조미륵보살입상(石造彌勒菩薩立像:국보 81)과 석조아미타불입상(石造阿彌陀佛立像:국보 82)이 발굴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는 3층석탑 1기와 연꽃무늬가 돌려 있는 석등(石燈) 대석(臺石)이 남아 있을 뿐이다
길게 늘어진 줄에 걸린 등조차 띄엄띄엄 한가하기가 그지없다..
부처님 오신 날이 머지않아 모든절집이 분주한 가운데 중생들을 맞을 준비가 한창인데 여기는 그저 한가롭다.
감산사지의 존재가 알려진 시기는 1915년 한 일본인에 의해서다.
당시 발견된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81호)과 감산사석조아미타불상(국보82호)이 발견되었고, 이 유물들은 1916년 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두 불상의 광배 뒷면에 새겨진 명문으로 이 절이 창건한 계기와 시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또한 이 두 점의 석조물은 조형적 우수성과 더불어 명문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 국보가 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명문에 따르면 김지성(金志誠)은 임금을 받드는 상사(尙舍)와 집사성(執事省)의 시중이란 중임을 역임한 후 67세에 벼슬을 버리고 한적한 곳에 살면서 무착(無着)의 유가론(瑜伽論)을 탐독하고 장자(莊子)의 소요편(逍遙篇)을 읽어 부모와 임금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서 이 절을 짓고 미륵보살상과 함께 이 아미타여래상을 조성하고 안치했다고 한다.
더욱이 명문의 끝 부분에 성덕왕 19년(720)에 김지성이 세상을 떠나자 아미타상을 만들었다고 하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지성이 719년에 어머니를 위하여 미륵보살을 조성하고 아버지를 위하여 아미타여래상을 조성하고자 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그 이듬해에 김지성이 돌아가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720년 이후에 이 상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내용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제3 탑상 제4 남월산조(南月山條)에서도 확인된다.
김지성이 탐독하였다는 유가론 혹은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의 원명은Yagacaraghumi인데, 유가는 명상· 정신통일의 수행으로, 일반적으로 선· 삼매 등으로 불리는 것과 동일하다. 유가사는 이 명상수행에 진력하는 사람을 의미하는바 이전부터 김지성은 불교의 높은 경지를 이해하던 사람으로 볼 수가 있다.
정성스러운 손길이 느껴진다. 아름다운 비구니 스님들이 정성껏 가꾸어 놓은 절집이다.
감산사 경내의 바위 위에 모셔진 비로자나불
현재 절터는 새로 불사되어 감산사지 3층 석탑 1기와 대적광전, 극락전, 산신각, 요사 및 비구니 수행처로 중창되어 졌다..
감산사지에 새로 지은 감산사의 주불전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18호 석조비로자나불(石造毘盧舍那佛坐像)을 모신 전각인 대적광전이다
대적광전 앞의 웃는 사자상이 정겹다.
경주 답사 여행은 가끔은 덤으로 건네는 문화유산에 기분이 좋아진다..
지인권을 하고 있는 석조비로자나좌불상 (경북 유형문화재 318호)
감산사 신중탱
감산사 지장탱
감산사 감로탱
석조비로자나좌불상 위의 천정
감산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경북 유형문화재 제 318호)
이 불상은 얼굴부분이 파손되었지만 어깨가 각이지고 무릎의 폭이 넓어 전체적으로 당당한 모습이다. 가슴 중앙보다 약간 아래쪽에 띠매듭이 조각되어 있으며 가슴앞에 올린 두손은 파손 되었지만 자세히 보아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쥔 모습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비로자나불의 초기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은 조각기법으로 보아 절의 창건당시이거나 그로 부터 가까운 시기 즉 8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비로자나불 좌측의 아미타부처님(보물 82호) 사진
비로자나불 우측의 미륵부처님(보물 81호) 사진
비로자나불 좌.우측 양쪽으로는 석조미륵보살 입상(보물 81호)과 석조 아미타여래 입상(보물 82호)이 사진으로 걸려있다. 진품은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감산사 동종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감산사는 신라 성덕왕 18년(719)에 김지성이 부모의 명복을 빌고, 국왕과 왕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이다.
창건 후 그는 어머니를 위해 미륵보살을, 아버지를 위해 아미타불을 만들었다고 한다.
석조아미타불입상은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인체 비례에 가까운 사실적 표현을 하고 있는 작품이다. 불상의 얼굴은 풍만하고 눈 코 입의 세부 표현도 신라적인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신체는 비교적 두거운 옷 속에 싸여 있어서 가슴의 두드진 표현은 없지만, 당당하고 위엄이 넘쳐 부처님의 모습을 인간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온 몸에 걸쳐서 U자형의 옷주름을 나타내고 있다. 목에는 한번 뒤집힌 옷깃을 표현했는데 이는 신라 불상의 특징으로, 불상의 전체적인 형태와 함께 불상을 박진감있게 보이게 하는 요소가 된다.
불상이 서 있는 대좌(臺座)는 하나의 돌로 만들었는데, 맨 아래가 8각이고, 그 위에는 엎어 놓은 연꽃무늬와 활짝 핀 연꽃무늬를 간략하고 큼직하게 새기고 있다.
불신 뒤의 광배(光背)는 배모양이며 가장자리에는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새겼다. 광배 안에는 3줄의 선을 도드라지게 새겨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구별하고 있으며, 몸광배 안에는 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인 국보 제81호와 82호가 같이 있는 모습.
대적광전 측면
후면에서 바라본 대적광전
감산사 대적광전 벽화
대적광전 꽃살문이 참으로 곱다..
새로 들어선 감산사의 대적광전이 당당하다.
대적광전 앞에서 내려다 본 경주 시가지쪽
그 옛날 여기서 한 눈에 내려다 보였을 화려했던 신라의 도읍지가 상상된다. 이 감산사에서 좌측으로 숭복사지(崇福寺址)가 있고, 중앙 아래쪽으로 원성왕릉(元聖王陵)인 괘릉(掛陵)이 있으니 두 사찰과 원성왕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질만하다.
관음전 앞에서 바라본 감산사 전경이다..
감산사 극락전
감산사 극락전내 아미타불
극락전 아미타불 위의 천정 단청
감산사 극락전 신중단
감산사 극락전 영가단
감산사 극락전 천정 단청
고운 극락전 꽃살문
후면에서 바라본 감산사 극락전
측면에서 바라본 감산사 극락전
커다란 하나의 바위 위에 지은 자그마한 산신각(?)
대적광전 바라보며 오른쪽 전각으로 스님 수행처인 금당
금당의 측면
금당의 후면
금당쪽에서 바라본 감산사 전경
금당 뒤쪽으로 자그마한 연못도 있었다
이렇게 물을 돌려 작은 연못으로 보낸다..
대적광전을 바라보며 왼쪽 전각으로 지성당(志誠堂)이다..
요사채인 듯한 이 건물의 당호는 아마도 처음 감산사를 지은 김지성(金志誠)에서 따온 듯한데 지은이의 재치가 엿보인다.
감산사 종무소는 054 - 746 - 7096
스님 수행처인 모양이다..
지성당 우측으로 차방이 있다.
지성당 뒤쪽의 스님 수행처 공간들..
감산사는 해우소 가는 길조차 너무나 이쁘고 고즈녁하다..
감산사의 정갈한 해우소
대적광전 뒤쪽으로 감산사지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감산사지삼층석탑 (甘山寺址三層石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5호
감산사의 옛 터에 남아있는 탑으로, 무너져 있던 것을 1965년 다시 세웠다.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석탑 양식이나, 현재 탑신의 2·3층 몸돌은 없어진 상태이다. 위·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와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에서 위로 치켜 올라 갔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
탑의 일부분을 잃어버려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없음이 아쉽지만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참으로 고즈넉한 절집이다...
비구니도량의 고즈넉한 절집 감산사를 나와서 효소왕릉을 찾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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