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충사 (경남 밀양시)
표 충 사
2015. 1. 23.
2015. 1. 22.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포항도량" 에서 108순례에서 40명이 가까운 밀양에 있는 표충사. 영산정사 그리고 여여정사로 2015년 신년 나들이 기도를 출발한다.
07:00 출발하여 09:00에 표충사에 도착, 고즈넉한 풍경이 마음을 편안하게 다스리는 표충사를 순례한다...
서기654년 신라 진덕여왕8년 원효대사께서 창건하여 이름을 죽림사라 하였다.
조선 현종때(1839) 월파 천유화상이 임진왜란을 맞아 승병을 일으켜 큰 공훈을 세운 서산,사명,기허 3대선사를 모신 표충사(表忠詞)를 이곳으로 이건(移建)하면서 절 이름도 영정사(靈井寺)에서 표충사(表忠寺)로 바뀌었다
표충사
밀양 표충사는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일으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충훈(忠勳)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표충사당(表忠祠堂)이 있는 절이다.
원래 이곳에는 원효(元曉)가 창건한 죽림사(竹林寺)를 신라 흥덕왕 때 황면(黃面)이 재건하여 영정사(靈井寺)로 개칭한 절이 있었다. 표충사라는 이름은 사명대사를 제향하는 사당을 당시 서원(書院)의 격(格)으로 표충서원(表忠書院)이라 편액하고 일반적으로 표충사로 불렀는데, 이 사당을 사찰에서 수호(守護)하여 왔으므로 사(祠)가 사(寺)로 바꾸어진 것이다.
원래의 표충사(表忠祠)는 밀양시 영축산에 있던 백하암(白霞庵) 자리에 있었으며, 사명대사의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나라에서 사원(祠院)을 세우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그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 승려들이 흩어지고 폐허가 되었던 것을 1714년(숙종 40)에 밀양 군수 김창석(金昌錫)이 사명대사의 충훈을 알고 퇴폐된 것을 민망스럽게 여겨 지방유지와 승려를 불러 사우를 다시 세울 것을 의논하였다.
그 뒤 남붕(南鵬)이 크게 중창하고자 1738년(영조 14)에 사명대사의 행적(行蹟)을 갖추어 임금에게 올리니, 임금이 교지를 내려 표충사의 잡역(雜役)을 면제하고, 전답(田畓) 5결(結)을 내리고 경상도 관찰사에게 중수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남붕이 총책임을 맡고, 연초(演初)·취안(翠眼)·최심(最心)·상현(尙玄) 등이 도왔다. 사우를 3칸으로 하고 단청을 하였으며, 사명대사의 영정을 중앙에 모시고 동쪽에 서산대사, 서쪽에 기허당을 각각 모셨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인 대광전, 팔상전, 명부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2호인 만일루, 표충서원 등이 있다. 또한 국보 제75호인 청동함은향완(靑銅含銀香垸)은 1177년(명종 7)에 제작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고려시대 향로이다.이 밖에도 보물 제467호인 표충사 삼층석탑, 중요민속자료 제29호인 사명대사의 금란가사(錦襴袈裟)와 장삼(長衫),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호인 표충사 석등,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호인 표충사비 등이 있다. 절 일원이 경상남도 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 표충사 일주문
홍제교를 지나 일주문으로......
표충사로 들어가는 첫 관문인 '일주문'
일주문이란 명칭은 바로 이런 건축적인 특징에서 붙여지게 된 것인데, 불교에서는 이러한 모습에 비추어 일심(一心)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즉 신성한 사찰에 들어서기 전에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누구나 이 곳으로 들어갈때에는 누구나 할껏 없이 정갈 마음가짐으로 들어갈야 할 것이다.
○ 표충사 광장
일주문에서 수충루로 이어지는 이 활렵수림은 언제나 방문객들에게 그늘을 선물해 주었지만 지금은 멋진 낙엽길을 선물해 주고 있다...
영사각 - 일주문을 지나 정문인 수충루 앞의 비각이다...
가람 수호를 기원하는 外伽籃閣이다. 죽은 자의 혼을 실은 영가가 경내로 들어 가기전에 잠깐 모셔지는 곳이다. 이 곳에서 영가는 속세의 떼를 벗는 목욕을 한다고 한다. 이러한 용도의 건물은 다른 절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독특한 종교적 건물이다.
순천 송광사에 있는 洗月閣 (달을 씻는다는 뜻으로 여자 영가를 위한 것임), 滌珠閣(구슬을 씻는다는 뜻으로 남자 영가를 위한 것임)과 같은 용도의 건물이다.
○ 수충루
표충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누각은 수충루(酬忠樓) 라는 이름의 누각이다. 그런데, 상당히 특이하다. 보통의 사찰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형태를 띄고 있다.
이 이유를 찾아보니, 서명대사의 위패와 서산대사, 기허대사의 위패를 모신 표충서원이 바로 이곳 표충사 내에 있기 때문에, 정문을 일반 서원처럼 정문에 3문 누각을 세웠던 것이다.
○ 표충사 경내도
1. 대광전 2. 약수영전 3. 팔상전 4. 응진전. 5 삼신각 6. 관음전 7. 명부전 8. 우화루 9. 범종각 10. 삼층석탑 11. 석등 12 영각
1 3. 삼성각 14. 만일루 15. 표충사당 16. 표충서원 17. 수충루 18. 가람각각
19. 영사각 20. 일주문 21. 유물관 22. 사천왕문 23. 종무소 24. 기념품 판매소 25. 설법전 26. 부도밭
○ 가람각
수충루 들어거면서 왼쪽에 위치란 1칸의 전각으로, 절의 영역을 수호하는 가람신을 모신 집이다.
가람이란 승려들이 사는 사찰 등의 건물을 의미한다. 가람신은 부처와 상관없이 가람을 지켜주는 신으로 모셔져 있는데 가람신이 절에 함께 있다는 것은 산신각이나 칠성각처럼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토속신앙과 융화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 표충사와 표충서원
수충루 정문을 들어가서, 바로 왼쪽에 보이는 건물이 바로 서명대사의 위패와 서산대사, 기허대사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표충서원(表忠書院)과 표충사(表忠祠)가 있다.
여기서 한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서원(書院)이라 함은, 유교문화를 바탕으로 한 공간인데, 어떻게 불교문화와 같은 공간에 있을까?? 이것은 위에 표충사를 전체적으로 나타낸 글에서 보듯이 사명대사의 위패를 모시는 유교적 서원인 표충사(表忠祠)를 수호하기 위해서 본래 영정사(靈井寺)인데, 표충사(表忠寺)로 개명한 사찰이다.
즉, 일주문과 통과한 후, 만나는 수충루를 포함한 표충사(表忠祠)는 유교적 공간이고, 사천왕문을 넘어서면 불교문화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이곳 표충사(表忠祠)와 표충사(表忠寺)는 불교와 유교가 통합된 한국사찰의 독특하고 유연성을 보여 주고 있다.
표충서원(表忠書院)
1744년(영조 20) 왕명으로 임진왜란 때 구국· 구민하신 3대 성사를 모시고 매년 춘추로 제향을 올리게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종 8년(1871년)에는 대원군에 의해 전국서원철폐령이 내려졌으나 표충서원은 훼철을 면했다고 하며 표충사가 불교와 유교가 통합된 한국사찰의 유연성을 보여 주고 있는 대표적인 예가 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서 구국의 큰 공을 세운 휴정(休靜:西山大師)·유정(惟政:四溟大師)·기허당(騎虛堂) 3대사의 충렬을 기리기 위하여 사당(祠堂)으로 설립하고 선조로부터 표충서원(表忠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고 한다. 서원 내에는 3대사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1972년 2월 12일 경남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되었다.
표충사(表忠祠)
사명대사의 고향인 밀양시 무안면에 세워졌던 것을 1839년에 이건하면서 대광전 옆 지금의 팔상전이 있는 곳에 위치해 표충서원이란 이름으로 있었으나 이후 1971년 팔상전과 자리를 바꾸었으며, 최근에 가람을 정비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어 표충사라고 편액하였다.
표충사에는 서산대사, 사명대사, 기허대사의 진영을 봉안하고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初丁日)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휴정(休靜:西山大師)·유정(惟政:四溟大師)·기허당(騎虛堂) 3대사의 진영 봉안
'표충사(表忠祠)'뒤로 펼쳐지는 영남의 최고봉인 재약산 사자평원이 찬란하다 말할 정도로 눈 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이다.
○ 유물관
유물관(遺物館)
표충사는 임진왜란때 승병장으로 큰 활약을 펼쳤던 사명대사의 충정과 깊은 관련이 있는 절이어서이곳 유물관에는 사명대사와 관련된 16건 79점의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시도유형문화재 제268호 표충사 진영및 탱화
시도유형문화재 제460호(경남) 표충사목조관음보살좌상
이 보살상은 조선후기 목조불상의 특징을 갖추고 있는 단아한 보살좌상으로 구전에 따르면 사명대사께서 모시고 다녔던 원불이었다고 한다.
보살상의 저부 복장공이 원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조각수법이 뛰어난 작품으로 자료적 가치가 충분하다.
시도유형문화재 제269호 교지(敎旨)
이 문서는 사명대사의 조부모와 부모등 사명대사의 일가에 임금의 명을 담아 내린 교지이다. 이 교지들 가운데 4장은 선조 35년(1602) 10월 30일에 사명대사 일가에 벼슬을 내린 증직교지이고, 나머지 한 장은 선조 40년(1607) 6월 8일에 내려진 교지이다.
표충사 청동함 은향완 (국보 제75호)
국내 남아 있는 행완으로 가장 오래된 유물 이다.
향완이란 절에서 마음의 때를 씻어준다는 향을 피우는데 사용하는 도구로서 향로라고도 부른다.
경상남도 밀양 표충사에 있는 청동 향완은 높이 27.5㎝, 아가리 지름 26.1㎝의 크기이다.
향완에 무늬를 새기고 그 틈에 은실을 박아서 장식한 은입사(銀入絲) 기술이 매우 세련된 작품이다. 향완의 형태는 주둥이 부분에 넓은 전이 달린 몸체와 나팔모양의 받침을 갖춘 모양으로,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전과 몸체가 닿는 부분을 둥글게 처리하고 받침 둘레의 가장자리에 얕은 턱을 만들어 안정감을 주었다.
○ 설법전
커다란 전각에는 의중당, 설법전, 대흥불법도량이란 현판이 3개 걸려 있다.
○ 기념품점 .차방
○ 사천왕문(四天王門)
사천왕문은 표충사의 사당(祠堂) 영역과 사원(寺院) 영역을 구분하고 있다. 원래는 대광전 맞은편 우화루 앞쪽에 사천왕문이 있었으나 최근 사당영역을 새롭게 조성하고 절의 진입로를 옮기면서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사천왕문이(四天王門)이 보인다.
표충사은 특색있는 사찰로, 보통은 출입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수호신들에 의해서 도량 내의 모든 악귀가 물러난 청정도량이라는 신성관념을 가지게 하려는 데도 뜻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또 다른 의미도 있다. 유교문화와 불교문화를 구분하기 위한 뜻도 같이 존재하고 있는 곳이다.
천왕 발밑을 한 번 정도는 그윽한 눈매로 보아도 괜찮으리라.....
○ 종무소
○ 표충사 삼층석탑(表忠寺 三層石塔, 보물 제467호)
사천왕문을 통과하면 사원영역으로 시원한 풍경과 함께 표충사 삼층석탑을 만나게 된다.
1839년(헌종 5)에 밀양군 무안면에 있었던 표충사(表忠祠)를 영정사로 옮기면서 절 이름도 표충사(表忠寺)로 개칭하였고, 가람배치도 큰 이동이 있었던 것이니 이 탑도 그 때에 옮겨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고 한다.
기단(基壇)은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으며, 각 면을 둘로 나누어 놓았고, 탑신부(塔身部)는 층마다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은 기단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형태로, 균형면에서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고, 표면 모서리에는 매우 넓은 기둥이 새겨져 있고 다른 장식은 없다.
2층 몸돌은 1층에 비하여 높이가 급격히 줄었으며 3층도 체감되어 있으며, 2·3층의 몸돌 모서리에도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으나 너비는 전체가 축소됨에 따라 좁아졌다.지붕돌은 밑에 4단의 받침이 있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었으며, 지붕은 아름다운 곡선으로 흘러내리다가 네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치켜올려져 있다.
꼭대기에는 탑의 머리장식이 얹혀져 있으나 정돈되지는 못하고, 그 위에 1m 가량의 끝이 뾰족한 쇠막대를 세웠다.
탑신부 1층의 몸돌이 지나치게 커다란 단점이 있으나, 기단이 1단으로 구성된 신라석탑양식을 따른 아담한 탑이고, 탑의 머리장식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서 주목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언듯봐도 유구한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3층석탑과 석등, 오랜시간 우리나라의 희로애락을 같이 했지만, 참 잘 보존되어 있는 것 같다.
○ 표충사 석등(表忠寺 石燈, 경남유형문화재 제14호)
삼층석탑 앞에 세워져 있는 석등으로 조각의 특징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 만일루(萬日樓, 경남문화재자료 제142호)
만일루 오르는 계단
조선시대인 1860년(철종 11)에 월암선사가 혜원법사의 유풍을 떨치고자 만일(萬日)의 기도 끝에 이룩한 건물이라 한다. 1926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29년 중건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92년에 보수된 것이다
H자형으로 된 독특한 구조의 건축물로서 108번뇌를 상징하는 108평의 부지에 불교의 48원(願)을 상징하는 48칸의 선실로 지어졌다. 이 건물은 무량수각 또는 서래각(西來閣)으로 편액되어 선방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이곳은 대한불교조계종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대종사가 말년을 보내다가 1963년 열반한 곳이기도 하다.
1860년(철종11) 월암선사가 아미타불의 48원을 상징하는 48칸과 108번뇌를 상징하는108평의 전각을 세워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무량수각 또는 서래각이라고 하였다.
서래각, 무량수각의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수제자인 위당 신관호의 글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