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여행/경상도

구름문을 가진 절, 운문사 (雲門寺)- 경북 청도군

꽃돼지. 2014. 10. 8. 23:22

구름문을 가진 절,  운문사 (雲門寺)

  


2014.  10.  8. 

 

 

2014. 10.  6.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포항도량" 의 '10기' (기장 김영숙 보살)에서 15명이 가까운 청도군에 있는 사리암. 운문사. 청신암. 내원암. 북대암으로  단합할겸 가을 나들이 기도를 출발한다.

 


운문사 가는 길에는 아름다운 숲이 있고,  너른 호수가 있고,  계곡도 있다.

누른 잎새 사이로 내년 복숭아꽃을 피울 꽃눈이 여물어가는 복사밭,   누렁반 초록반의  이파리를 달고  고운 열매를 맺고 있는 청도 명물 감나무,   복숭아 나무와 키재기를 하는 대추나무…. 과일의 고장답게 어딜 가나 과실수로 가득한 청도의 구릉길은 풋풋하고 싱그럽다.

들판을 넘어 고갯길을 올라가면 호숫길.  잦은 비로 넘실댈 줄 알았던 운문호는 적당한  물을 담그고 있고  드라이브 코스로 이만한 곳도 없다.    이렇게 산과 들에 눈길을 주며 달리다보면 운문사 입구다.

 

06:30 출발하여 09:00 에 시작하는 사시예불 기도 시간을 마추어  고즈넉한 풍경이 마음을 편안하게 다스리는 나반존 기도 도량 운문사 사리암으로 가서 기도 후 점심 공양하고 운문사로 향한다...

 

 

 

 

 운문사 매표소다...

 

 

◯  운문사 솔바람길

 

 

 

 

가을에 접어든 시월.

세상은 열기로 가득하고 머리는 무겁다.   맑은 숲과 푸른 물이 그리울 때 운문사에 한번 가보자.   세상사에 닳고 지친 마음을 내려놓고 운문사 숲길을 걸어보자.

 

 

 

 

운문사는 나무와 숲이 좋은 산사.   초가을 운문사 숲길은 어디 내놔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울창하고 아름답다.   운문사 내 4개 암자로 향하는 길에서도 울창한 숲터널을 만나게 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매표소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에 펼쳐진 솔숲.   짧게는 수령 100년 안팎부터 길게는 수령 200~300년의 소나무가 빽빽하게 자라 있다.

 

 

 

 

운문사 입구의 고적한 소나무 숲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일제를 향한 한이 서린다.   송진채취를 위해 수난 당한 나무들이 애처롭다는 생각도 든다.....

 

 

 

 

 송진을 채취하기 위해 나무에 생채기를 낸 흔적....

 

솔숲을 거닐다보면 수백년 노송의 밑동에 하나같이 생채기가 또렷하게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일본인들이 전쟁물자로 쓰던 송진을 채취하기 위해 칼집을 냈던 흔적.   어쨌든 난고의 세월을 버텨낸 나무 한그루 한그루가 고맙다. 

 

 

 

 

 

 

눈보다 마음을 여는 것이 더 중요해서일까?   천년 세월을 버텨온 가람에 드는 이런 숲길에선 발걸음이 가볍다.

기둥은 물론 솔가지 하나 반듯하게 펴진 것이 없을 정도로 이리저리 휘어진 소나무는 모두 서쪽을 향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솔숲에는 벤치가 놓여 있고, 그 옆으로는 맑은 계곡이 흐른다.   솔숲길은 더위를 식혀줄 뿐 아니라 가슴 속에 켜켜이 쌓인 속진의 때도 씻어준다.

 

 

 

 

 

 

 

운문사 입구 가기전 세속오계비

 

신비로운 이야기를 거느리지 않고 있는 사찰이 어디 있으랴만 몇 차례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른 운문사는 삼국통일 주역이었던 화랑들의 정신적 지침인 세속오계를 전수해준 원광법사에 의해 역사의 무게를 더하고,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선사에 의해 문화의 깊이를 남달리 간직한 도량이 된다.

 

 

솔숲길을 지나면 바로 운문사다.   신라 진흥왕 때 지어진 운문사는 1,500년 역사를 가진 대가람.   경내는 단아하다.

당나라에서 돌아와 1,200년전 세속오계를 전수했던 원광법사,   삼국유사를 쓴 일연스님이 주석했다. 유서깊은 고찰답게 경내에는 석탑과 불상 등 7개의 보물이 있다.   1958년부터는 국내 최대의 비구니 승가대학까지 들어섰다.

 

 

 

 

 

 좌측길은 차로 사리암주차장 가는 길   우측길  운문사 주차장 길

 

 

 

 

무거운데 마음 내려놓고 오시게…청도 운문사 가는길

 

 

 

 

 운문사 주차장의 고목

 

 

 

 

운문사는 성과 속의 경계인 일주문이 없다…구름이 일주문이다

 

 

 

 

 

 

 

길가 나지막한 담장은 산사의 안과 밖을 운치있게 나누어준다.  너무 드러나지도 그렇다고 삼엄하게 보이지 않는 그 나지막함이 참 보기 좋다.

 


 

 

 

 

 

 

청도 운문사는 서기 557년 神僧(신승)이 호거산 금수동에 들어와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를 하더니 크게 깨달아 절을 짓기 시작한 지 7년 뒤인 566년(진흥왕)에 '오갑사'를 창건하였다.   그 중앙이 '대작갑사'(現 운문사)이고 나머지 네 방향으로도 사찰이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600년에 중국에서 돌아온 원광법사가 이 절을 중창하고 두 청년에게 세속오계를 전수했으며 고려 태조 때 보양국사가 까치가 땅을 쪼고 있는 곳에 오갑사와 삼층석탑을 다시 중창하고 937년에는 태조가 '운문선사'라는 사액과 전지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그 후에 고려 숙종 때 원진국사가 다시 중창을 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일부가 소실되어서 조선 숙종 때 다시 중건되었다... 중창... 중창을 거쳐 현재는 비구니 전문강원으로 알려져 있다.

 

 

 

 

 

 

◯  운문사 범종루

 

 

운문사는 남원 실상사와 마찬가지로 평지에 지어진 사찰이다.   하지만 가람을 두르고 있는 산이 높고 산뿌리는 넓다.  

동쪽으로는 운문산과 가지산이 어깨를 맞대고 있다.   서쪽으로는 비슬산,   남쪽으로는 화악산,   북쪽으로는 삼성산이 운문사를 감싸고 있다.   어떤 눈밝은 선승이 이런 아늑한 터를 찾아 냈을까?

 

 

 

 

운문사!   참 좋은 이름이다.  ‘운문’(雲門)이란 말보다 그 소리와 뜻이 잘 어울리는 낱말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구름의 질료와 생태가 그와 같듯이 '운문'이란 소리는 부드럽고 가볍고 은은하고 신비한 느낌을 준다.

구름문을 가진 절이라니!

그러고 보니 운문사에는 일주문이 없다.  구름이 일주문인 셈이다.   운문이란 말은 그러므로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성(聖)과 속(俗)의 경계인 일주문을 대신하는 엄연한 실체이다.

 

 

 

 

운문사는 북쪽 사하촌에서 들어오는 진입로 쪽만 빼고  남쪽 운문산,   서쪽 억산과 장군봉,   북동쪽 호거산이 삼면을 에워싸고 있다.  그 모양이 연꽃 같다고 해서 운문사를 화심(花心)에 비유한다.

운문사는 그중에 운문산 지맥 호거산을 둥지로 여긴다.  생김새가 웅크린(踞) 호랑이를 닮아서 붙은 이름이다.

 

 

 

 

범종루 편액 '호거산 운문사'는 한 점 흠 잡을 데 없이 깔끔한 글씨가 눈을 사로잡는다.  여초 김응현(1927~2007)님 작품인가 했더니  형님인 일중 김충현(1921~2006)님이 쓰셨다....  운문사에선 당대 명필 일중 - 여초 형제의 글씨를 함께 볼 수 있다.

 

 

 

 

운문사라는 이름이 운문사를 구름 속에 감추고,   구름으로 만든 문이 사찰의 경내를 신비의 베일로 감싼다는 데 있다.    구름문 열고 들어서 보자.....


 

 

 

가을 빛 고운 햇살은 경내 뜨락에 온온하게 퍼지고, 그 햇살이 닿는 곳곳에 존재해 있던 모든 것 들이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올봄에 다녀온 통도사의 범종루 편액과 완벽하게 똑같은 글씨다.   통도사 것을 받아와 편액에 글자를 새긴 듯하다. 

 

 

 

◯  운문사  전각 배치도

 

 

 

◯  운문사 대웅보전

 

 

 

 

운문사에는 주불전이 두채가 있다.

두개의 대웅보전 가운데 삼세불을 모신 신축 1994년에 새로 신축한 건물이 만세루 앞의 대웅보전이다.

 

 

 

 

대웅보전 편액 글씨도 속리산 법주사 대웅보전 것을 빌려왔다.  주련은 일중 김충현님이 썼다.  우리나라 양대 기업 삼성과 현대의 한자 로고를 쓴 분이니까 당대 명필이라고 할만 하다.

 

 

 

 

 

 

 

법당 안엔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불을 모셨다. 

 

 

 

 

 

 

 

가운데엔 현재불인 석가모니불이 오른손을 어깨까지 들어 손바닥을 보이는 시무외인과 왼손은 손바닥이 하늘을 보게 해 내리는 여원인 손갖춤을 하고 계신다.   어떤 두려움도 없애주고 어떤 소원도 들어준다는 뜻으로 모든 부처가 취할 수 있다고 한다.    왼쪽엔 보현보살,  오른쪽엔 문수보살이 각기 연꽃 봉오리를 들고 협시한다.

 

 

 

 

왼쪽엔 과거불인 연등불이 오른손은 법문을 하는 수인을 하고 왼손은 가사 자락을 쥐고 법을 전하는 손갖춤을 하고 있다.   삼세불 사이와 양쪽 끝에 네 보살이 있어서  오른쪽은 보현보살이고 왼쪽엔 대세지보살이 지혜의 힘을 상징하는 금강저를 쥐고 있다.

 

 

 

 

오른쪽은 미래불인 미륵불이다.   지금도 수행 중이라는 뜻으로 참선할 때 짓는 손갖춤 선정인을 하고 계신다.    왼쪽은 문수보살이고,  오른쪽엔 관세음보살이 오른손에 중생의 갈증을 덜어줄  감로주가 담긴 정병을,  왼손엔 중생에게 시원한 그늘을 주는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불 위로  장엄한 닫집


 

 

 

 

 

 

대웅보전 신중탱



 

 

대웅보전 칠성탱

 

 

 

 

대웅보전 실내 벽화


 

 

 

 

 

 

법당 양쪽에 윤장대가 있다.  안에 경전을 모셔 한번 돌리면경전 한 권 읽는 것과 맞먹는다고 한다. 보물 684호인 예천 용문사 윤장대를 본떠 만들었다...

 

 

 

 

 

 

 

 대웅보전 천장에 전등이 매달려 있다.  연꽃 모양 갓을 하긴 했어도 어쩐지 안 어울려...

 

 

 

 

 

 

 

대웅전의 문살

 

 

 

 

 

 

 

 

 

 

 

 대웅보전 주련  能救法界苦衆生은 一中 金忠顯선생의 글씨이다..  운문사에선 당대 명필 일중 - 여초 형제의 글씨를 함께 볼 수 있다.

 

 

 

 

 

 

 

 익공은 삼출목 수서형으로 처리했다.  처마 뒤로 호거산 자락이 보인다.

 

 

 



 

 

운문사는 또 하나 대웅보전을 1994년에 새로 지어 주불전으로 삼았다.

기존 대웅보전은 비로자나불을 모신 비로전이었기에 석가모니를 모신 진짜 대웅전이 필요했던 것이다.  정면 일곱 칸,  측면 다섯 칸의 커다란 건물이지만 역시 오래 묵은 맛이 없이 생경하다.

 

 

 

  


◯  운문사  응진전과 조영당

 

 

 

 

 

 

 


 

 

 

운문사 경내 벽화 .운문사는 원광법사가  신라 화랑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를 내려준곳이기도  하고 원광법사가  운문사의 제1 중창자이기도 하다.

 

 

 

 

 

 

 

 

 

 

 

 

 

 

 

 

 

 

 

 

 

 

◯  운문사 전향각

 

 

 

 

 

대웅전 왼쪽엔 수수한 기와집이 한 채 있다.  요사채인 전향각이다.  운문사는 비구니 사찰이어서 남쪽 출입 금지 구역이고 사채와 승가대가 모여 있지만 전향각만이   앞쪽으로 나와 있다.  손님을 모시는 영빈관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도사 중로전 안쪽에 자리한 요사채 전향각과 이름이 같고 거기 구하스님이 쓴 편액 글씨와 똑같다. 통도사의 것을 편각했나 보다...

 

 

 

 

'전향'이란 중국 당.송대에 전서 모양으로 만든 향을 가리킨다.  불을 붙여 벌레를 쫓았는데  타들어 가는 것으로 시간을 재기도 했다고 한다.  하나 타는 시간이 하룻밤의 100분의 1에 해당해 백각향(百刻香)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전향각 편액 글씨도 통도사에서 빌려 왔다.

 

 

 

 

◯  운문사 오백전

 

 

 

  

 

오백전은 정면 다섯 칸,  측면 세 칸 팔작지붕으로  가장 크고 당당한 건물이다.

 

 

 

 

전각 이름도 독특하게 오백전이라고 붙였다. 일제강점기 통도사 주지를 지내며 많은 편액 글씨를 남긴 명필 축산 구하스님이 쓴 편액이다.

 

 

 

 

오백전 이다.

 

내가 불사를 함에 깊고도 묘한지라.

빈산에 사람 없으나 물은 흐르고 꽃은 핌이라.

전성과 후성이 모두 말로써 가르치니

말은 포곡새(뻐꾹새)와 같으나 뜻은 전하지 못함이로다.

분화는 붉음을 띄우고 향로의 연기 푸르름 스밈이라.

물음도 없고 답함도 없으나 뜻과 같이 자재함이라.

나는 도안으로써 법을 전하는 宗이 되고

너는 원력으로써 법을 두호하는 용이 됨이라.

 

 

 

 

 

 

 

나한전 주존불은 석가모니불이다.  오른쪽에 미륵보살,  왼쪽에 제화갈라보살이 협시한다.


 

 

 

 

 

 

 

 

 

법당 안에 빼곡히 앉은 나한들의 생김새와 표정이 저마다 다르다.  나한을 하나씩 살펴보노라면 자기와 닮은 얼굴을 만난다고 하니  찬찬히 들여다볼 일이다.  그런데 하나같이 귀가 큰 건 왜인지,  맨 앞 나한은 왜 무릎에  우리 민화 호랑이 같은 짐승을 안고 있는지 궁금하다.....

 

 

 

 

 나한은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은 불교의 성자들을 가리킨다.  보살도 나한도 신앙대상으로 받들지만  다른 점은 나한이 대개 실존인물이라는 것이다.

 

 

 

 

빼어난 미감의 오백나한들이 천년의 시간과 공간을 말없이 간직하고 있다.

 

 

 

 

나한의 숫자는 16,   500,  1200 식으로 다양한데  보통은 16나한과  500나한으로 말한다.  웬만한 절마다 있는 나한전 또는 응진전,   또는 영산전은  대개 16나한을 봉안한다.

 

 

 

 

운문사 나한상은 500에서 하나가 모자란 499라 한다.  하나는 뒷산 호거산 중턱에 있는 사리암에 1845년 나반존자상으로 모셔져 있다는 설화가 내려오니  499가 맞는지 한번 헤아려 보는 것도...

 

 

 

 

인동과 연꽃 무늬 이출목 익공 위에 봉황 보머리가 내밀었다.

 

 

 

 

아래 살미(쇠서)는 끝이 하늘로 치켜 올라간 앙서형이고 위 살미는 아래로 숙인 수서형으로 변화를 줬다.

 

 

 

 

 

◯  운문사 극락교

 

 

 

 

 

 

극락교....  참 예쁜 다리지만... 수행하는 곳이라 외부인 출입 금지 구역이라...   건널 수가 없다

 

 

 

 

 

  이 다리 아래에서  살았다는  서해바다 용왕의  아들 이야기인 이목소 전설을  들어 보았는지?

 

 

 

 

 

 

 

 

 

 

 

 

 

 

 

 

◯  운문사 비로전  (옛 대웅전)

 

 

운문사는 1994년 석가모니불을 봉안한 새 대웅전을 지으면서 이 옛 대웅전 편액을 비로전으로 바꿔 달아 이름을 바로 잡았는데  이번엔 문화재청이 가로막고 나섰다.  보물 명칭이 '운문사 대웅보전'으로 올라 있기 때문에 바꿀 수 없다고 버티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도로 대웅보전 편액을 달았다고  한다.   문화재청 고집도 엔간하다.  그래서 운문사 홈페이지와 브로셔에는 이 전각 이름이 비로전으로 돼 있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봉안한 절의 주불전이고 대적광전 또는 비로전은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전각인데 17세기에 새로 지으면서 엉뚱하게 대웅보전이라는 편액을 달았다.   조선 중-후기 스님들이 계율 공부보다는 선(禪)에 집중하면서 무심코 대웅전으로 써 붙인 탓으로 짐작한다.  인조 숙부 의창군이 잘못 써서 내려보낸 편액을 거부하지 못한 채그대로 달고 있는 화엄사 대웅전처럼.....

 

 

 

 

 

 

 

비로전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출목 공포 장식을 한 다포계이면서도 그리 요란하지 않다. 익공이 셋 내민 삼출목의 쇠서들을 모두 생략하고 메뚜기 머리 모양으로 단순하게 깎아 정돈된 느낌을 준다.

절을 지은 도편수와 대목들이 모두 스님이어서 장식과 재치를 부리지 않고 선문답 하듯 튼튼하고 견고하게 지은 탓인 듯하하다.

 

 

 

 

조용한 법당 문을 열고 들어선다.

비로자나불 불상 주위 옥색이 도는 푸른빛 단청은 신비하고 단아하게 다가온다.

비로자나불이 좌우 협시도 없이 홀로 앉아계신다.   근데 부처의 앉음새가 조금 풀어진 듯 보이기도...결가부좌를 하지 않고 오른쪽 발을 편안하게 바닥에 내려놓으셨다.   

 

 

 

 

기독교의 신처럼 우주를 주재하는 비로자나불은 석가나 극락 주재 아미타불이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근원적 존재다.    이치와 지혜,  중생과 부처,   미혹함과 깨달음은 본래 하나라는 뜻으로 오른손으로 왼손 검지를 말아 쥔 지권인 손갖춤을 하고 있다.   후불탱은 1775년 영조 때 그린 것이라 한다.

 

 

 

 

 

 

 

운문사에는 주불전이 두채가 있다.  대웅보전은 조선 숙종때 중창된 건물로 이전에는 비로전이라 불렸다. 1994년에 새로 신축한 건물이 만세루 앞의 대웅보전이다.

절집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모시면 대웅보전이라고 하고,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면 대적광전, 혹은 비로전이라고 한다

 

 

 

 

안쪽은 큰 기둥을 하나만 세워 넓고 탁 트인 공간을 꾸미고 있다.

 

 

 

 

비로전 내부 불단 서쪽 천장엔  용머리 장식을 하고 몸체에 용틀임을 표현한 용가(龍架)가 걸려 있는데  용가에 달린 여러 개 작은 방울을 줄로 잡아당겨 울리게 돼 있다.  근데 그 줄에 앙증스러운 동자상이 매달려 있다.

용이 끌고 극락으로 가는 반야용선을 놓친 보살이 배에서 던져준 밧줄에 악착같이 매달려 극락정토에 갔다고 해서 악착보살,   또는 악착동자라고 부른다.

 

 

 

 

 천장의 가운데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미고 화려하게 채색해 놓았다.


 

 

 

 

 

 

신라시대에 세운 운문사는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는데 지금의 절은 조선 숙종 44년(1718)에 있었던 네 번째 보수 때의 것이다. 대웅보전도 이때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이며 기둥 사이의 간격을 넓게 잡아서 같은 규모의 건물보다 크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다포계 건물들과는 달리 장식으로 치우치지 않았다.

 건물의 짜임이 조선 중기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앞면에는 꽃무늬를 넣은 문을 달았는데, 특히 가운데 칸은 넓어 5짝 여닫이 문을 달았다.  솟을 빗살문에 꽃은 없고 이파리 무늬로만 장식했다.

 

 

 

 

 귀면상도 있다

 

 

 

 

 문짝 아랫부분 궁창도 들여다 본다.   용을 그린 것도 있고.....

 

 

 

 

연꽃과 당초무늬를 재미나게 섞었다

 

 

 

 

빗살 교차점에 수직으로 장살을 관통시킨 솟을 빗살문의 육각형  안 교차점에 꽃을 얹은 솟을 빗꽃살문이다. 아름다운 법당 꽃살문에 꼽힌다.  흔히 서까래부리  단청에 쓰는 여섯 잎 연꽃을 얹었다.

 

 

 

 

허버드 前 주한미국대사 부인이  미국으로 돌아간 뒤 한국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것 하나를 꼽으라고 하자 운문사에서 보낸 하룻밤이었다고 한다.

중국  광저우 인근에 호거산  운문사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청도 운문사가 있다.   청도  운문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동화사 말사이다

 

 

 

 

백수의 왕이자 부처의 심부름꾼 사자를 불법 수호상으로 세워 놓았다.  대개 비로자나불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어느 사자가 수놈이고 암놈인지는 조금만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해태상 (해태는 해치라고도 하며 불을 진압하는 상징적 동물로 조선시대 한양이나 한양 근교의 산에는 불을 막기 위해 해태상을 세워 두었다.)

 

 

 

 

 오른쪽 사자가 암놈이다

 

 

 

 

가슴에 뭔가 붙어 있다

 

 

 

 

새끼가 매달려 젖을 빨고 있다.  암사자가 불법을 지키면서도 새끼를 챙기는 모성에 미소 짓는다.

 

 

 

 

마당에 향나무처럼 다듬어 동물 모양을 만든 나무가 있다.  삐삐머리 같기도 하고 토끼 같기도 하고 새 같기도 하다.  비구니 사찰답게 애교 있다.   감탕나무과 상록 활엽 관목 꽝꽝나무다.  잎이 탈 때 꽝꽝 소리를 낸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불이문 앞을 지나 안쪽으로 더 들어와 돌아본 모습이다.   오른쪽이 불이문 있는 요사공간이고  왼쪽이 옛 주불전 비로전이다.

석등과 석탑이 선 비로전 마당이 예전엔 절 중심영역이었던 것이다.

운문사가 산에 에워싸였지만 계단이나 석축 없는 평지 사찰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풍경이다.

 

 

대웅보전 (비로전) 주련 이다

 

莫謂慈容難得見  (막위자용난득견)    부처님의 자비로운 모습 뵈옵기 어렵다고 말하지 말라

不離祗園大道場  (불이기원대도량)    기원정사 대도량을 떠나지 않고 계시거늘

虛空境界豈思量  (허공경계기사량)    허공의 경계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리오

大道淸幽理更長  (대도청유이갱장)    대도는 맑고 깊으며 이치는 영원하도다

 

 

 

 

 

 

 

 

 

 

 

 


왼쪽 벽엔 2013년  3월,   보물로 지정된 관음보살 - 달마 벽화가 그려져 있다.  관음과 달마가 한 화면에 담긴 유일한 예라고 한다.  17세기 후반~18세기 초 작품이라 한다.

 

 

 

 

신라시대(新羅時代)에 창건된 운문사(雲門寺)는 여러차례의 중창(重創)을 거쳤는데 현재의 가람은 조선(朝鮮) 숙종(肅宗) 44년(1718)에 있었던 네번째 중창 때의 것이다. 대웅보전(大雄寶殿)도 이때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이며 기둥 사이의 간격을 넓게 잡아서 같은 규모의 건물보다 크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으로,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다포계 건물들과는 달리 장식으로 치우치지 않았다.

앞면에는 꽃무늬를 넣은 문을 달았는데, 특히 가운데 칸은 넓어 5짝 여닫이문을 달았다.  안쪽은 큰 기둥을 하나만 세워 넓고 탁 트인 공간을 꾸미고 있다. 천장의 가운데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미고 화려하게 채색해 놓았다.




 

 

 



 

◯  운문사  석등(보물 제193호)

 

 

 

 

금당 앞 석등은 우리나라 석등의 기본 형태인 팔각형으로 받침은 네모난 형태이고 그 위는 모두 팔각형을 이루고 있다.

하나의 돌로 기둥돌과 연꽃 받침석을 조성하였고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히고 조각도 우아하다.

석등은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 면마다 연꽃이 새겨져 있고, 꼭대기도 연꽃봉오리가 올려져 있다.

 

 

 

 

 석탑안에 보이는 작은 스님 석상의 모습이 멋지게 보여서 찍어 봤다.

 

 

 

 


◯  운문사 삼층석탑

 

 

 

 

전복되기 쉬운 배 모양의 흉맥 지세를 누르기 위해 세웠다는 삼층석탑... 보물 678호

  

 

 

일제강점기에 기단부를 보수하면서 석재 여러 개를 새로 짜맞췄다고 한다.  통일신라 후기부터는 탑의 기단이나 탑신에 여러가지 부조상이 등장하는데,  이 쌍탑 상층기단에도 빙둘러 팔부중상(八部衆像)이 새겨져 있다.용  산 국립중앙박물관 일층 복도에 전시돼 있던 석탑 기단 팔부중상처럼....

 

 

 

 

팔부중이란 고대 인도 이래 불법을 지키던 여덟 신을 가리킨다.  왼쪽은 팔 여덟 달린 아수라이고, 오른쪽은 비파를 든 건달바 이다.

 

 

 

 

 

 

 

 

 

 

 

 

 

대웅보전 앞에 동·서로 서 있는 이 두 탑은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규모와 양식이 서로 같다.

각 층의 기단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기고,  특히 윗층 기단에는 8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겨 놓았는데 모두 앉아 있는 모습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 밑이 수평을 이루며,  밑면의 받침은 5단 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각 부분들이 차례로 올려져 있는데, 모두 본래의 것들입니다.

기단의 가운데 기둥이 아래층 기단에서는 2개이던 것이 윗층 기단에서는 1개로 줄어 들고,   표면에 조각을 둔 점 등으로 보아 9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기단부가 몹시 부서져 무너지기 직전이던 것을 일제시대에 보수하였다는데 이 때에 팔부중상 등 일부를 새로운 돌로 보충하였다 한다.

 

 

 

 

 

 

◯  운문사 작압전

 

 

 

 

관음전 왼쪽에도 한 칸짜리 작은 전각이 있는  같은 한 칸이어도 관음전보다 더 작다.  법주사 원통보전처럼 사모지붕을 얹었다.  용마루가 지붕 중앙 꼭지점에 모여 삿갓처럼 생긴 지붕이다.

1941년에 새로 지어 얼마 안 됐고 운문사에서 제일 작아도  절 창건 내력이 담긴 중요한 전각이다.

우선 전각 이름이 희한해서 까치 작(鵲) 오리 압(鴨)을 써서 작압전 이다.

1400년을  이어져 오고 있는 운문사의 내력이  '작압' 이라는 두 단어에  들어가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물 석조여래좌상과 사천왕 석주를 모신 작압전((鵲鴨殿)

 

서기 560년 신라 진흥왕 때 어느 도승이 이 일대에  산허리 갑(岬) 자가 들어가는 절 다섯 개를 지었다고 한다.

이 5갑사 중에 가운데 중심 절이 까치 鵲 자 쓰는 대작갑사였고  지금의 운문사라고 한다.

바로 그 '작갑'이 이 전각 이름 '작압'으로 변형돼 전해오며  '갑'이 오리 압(鴨)이 된 연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편액 오른쪽에 쓰인 '경술 8월'이라는 시기를 눈여겨 봐둘 필요가 있다.

 

 

 

 

운문사 사천왕석주(보물 제318호)는 고려시대 석불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2기씩 모두 4개의 석조 사천왕상이 돌기둥처럼 배치돼 있다. 

 

 

 

 

불전에 모신 석조 석가여래좌상의 불상 높이가 63cm, 광배까지 합쳐도 92cm밖에 안 돼 아담하다.

신라 말, 고려 초 것으로 광배와 가장자리 불꽃무늬, 연꽃 좌대까지 온전히 남아  보물 317호로 지정됐지만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형식적이고 무게감이 없어 예술적 가치는 떨어진다.  항마촉지인 손갖춤 표현도 어색하다.

 

 

 

 

사천왕석주는 운문사 작압전(鵲鴨殿)안에 모셔진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의 좌우에 각각 2기씩 모두 4개가 돌기둥처럼 배치되어 있다.

원래의 위치는 아니고,  이곳에 세워진 벽돌탑의 1층 탑신 몸돌 4면에 모셔져 있던 것으로 보인다.

모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으며,   머리 뒷쪽으로 둥근 광채를 띤 채 악귀를 발로 밟고 있다.

 

 

 

 

사천왕은 부처를 모시는 단의 사방을 지키기 위해 두는 방위신(方位神)의 성격을 띠는데,  동쪽이 지국천왕(持國天王),  서쪽이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이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이 다문천왕(多聞天王) 이다.

이 4개의 사천왕상 돌기둥은 신체가 큰 반면,   돋을새김을 뚜렷하게 하지 않아 양감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체구도 약해 보이고 얼굴 생김새도 부드러운 것으로 보아 시대가 내려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880년에 만들어진 보조선사탑(普照禪師塔) 사천왕상이나 철감선사탑(澈鑑禪師塔) 사천왕상과 비슷하지만,  보다 크고 띠주름도 굵어지는 등 형식화된 면이 있어서 8세기 석굴암의 사천왕상과 비교하여 시대적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통일신라 후기 또는 후삼국시대인 900년경을 전후해 만들어진 작품으로 짐작된다 한다.

 

 

 

 

사천왕은 부처를 수호하기 위한 방위신의 성격을 띠며 부분적으로 채색을 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석가여래상을 호위하듯 양쪽에 둘씩 서 있는  보물 318호 사천왕 석주(돌기둥)는 세부 표현이 빼어나고 조각수법도 세련됐다.

부조상인데도 오히려 석상인 석조여래상보다 더 입체적이고 양감이 풍성하다.

사천왕 얼굴들이 매우 젊은 청년인 것도 독특하고  키 114~128cm로,   서기 900년 신라 말 후삼국시대 작품으로 짐작 한다.

대개 절 입구 천왕문에 서서 절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이 어떻게 법당 안에 들어와 있을까?

사천왕상은 석탑에 새기는 경우도 많아서 이 석상은 탑의 4면에 붙였던 것이거나 탑 안을 장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칼을 쥔 지국천왕)

 

 

 

 

 신라 말, 고려 초 운문사를 일으켜세운 2대 중창주 보양국사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서해를 건너 돌아오는데 용왕이 '작갑'에 절을 지으라고 한다.   보양국사가 용왕 아들 이목을 데리고 대작갑사에 와보니 절은 사라졌고 탑 자리를 까치(鵲)들이 쪼고 있어  땅을 파 보니 거기서 나온 벽돌로 오층 전탑을 쌓고 절을 새로 지었다고 한다.  (탑을 든 다문천왕)

 

 

 

 

보양국사는 앞서 청도 경계까지 쳐내려온 왕건을 도와 산적을 물리치게 했는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해 고려를 세운 뒤 보양국사가 세운 작갑사에 경작지를 후하게 쭈고 운문선사라는 절 이름을 하사해 이때부터 운문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삼고저(杵)를 쥔 증장천왕)

 

 

 

                              

보양국사의 오층 전탑은 1718년 전에 환작대(喚鵲臺)라고 부르다가 흑백 사진 속 전탑과 목조지붕을 섞은 작압전으로 바뀐 것으로 짐작한다.

지금 작압전 편액에 쓰인 '경술년'은 첫 작압전 건축 시기를 가리키는 것이어서 ​1703년 1790년 1850년 1910년 중에 한 해일 것으로 짐작한다.

그 작압전을 1941년 새로 지으면서 위치도 지금 자리로 옮기고 전각 모양도 사방 한 칸으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작압전에 모신 여래상과 사천왕상도  옛 벽돌전탑 안에 모시거나 탑신에 새긴 것으로 본다.

까치와 용왕 부자에 얽힌 보양국사 중창 설화는 보각국사 일연이 쓴 한민족 대서사시 '삼국유사'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일연은 1277년 일흔두 살에 운문사에 찾아와  1282년 충렬왕의 부름을 받고 개경으로 떠날 때까지 5년을 머무르며  삼국유사 집필에 몰두 한다.  (불꽃을 든 광목천왕)

 

 

 

 

 

 

 

 

 

 

 

 

◯  운문사 관음전

 

 

 

 

 

관음전 이다.

백의관음(白衣觀音)은 말없이 말하고 남순동자(南巡童子)는 들음 없이 듣도다

꽃병위에 버들은 항상 여름인데 바위 위의 대나무는 시방의 봄일세.

한 떨기 붉은 연꽃 바다위에 떴으니 푸른 파도 깊은 곳에 신통(神通)을 나투시네.

지난밤에 보타락가(寶陀落迦)산의 관세음보살님이 오늘은 도량 안에 강림하셨네.

 

 

 

 

관세음보살상이 생각보다 작고 남성적(?) 이다.  뒤에 걸린 후불탱 수월관음도는 1816년에 그렸다고 한다.

 

 

 

 

 

 

 

 

 

우물 정자 모양을 한 우물천장을 연꽃 무늬로 장식했다.   단청한 지가 얼마 안 된 듯 새뜻하다.  법당 천장을 꽃으로 장식하는 것은 석가모니가 설법할 때 하늘에서 꽃비,  우화(雨花)가 내렸던 것을 재현해  부처에 바치는 찬양이자 공양이라고 할 수 있다.


 

 

 

 들보가 교차하는 부분엔 국화가 자리했고..

 

 

 

 

 불단 탁자 앞면은 윗줄엔 국화.. 아랫줄엔 연꽃과 줄기를 투각해 장식했다.

 

 

 

 

또 다른 불탁엔 모란과 연꽃을 번갈아 새겨 놓았다

 

 

 

 

 

 

 

 

 

 

빙 둘러가며 네 기둥에 걸린 주련 글씨는 입구 범종루 편액를 쓴 일중 김충현님의 동생 여초 김응현님 작품이다

 

 

 

◯  운문사 명부전

 

 

 

 

명부전은 명부를 지키며 지옥에 떨어진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을 모신 법당이다.  그래서 지장전이라고도 한다.

 

명부전 이다.

지장보살님의 크나큰 위신력이여  억겁을 두고 설명해도 다 말하기 어렵도다

잠깐만 보고 듣고 예배하여도 인천(人天)에 이익된 일 무한히 많아

 

 

 

 

 

 

범종루에서 처진소나무 앞을 지나면 등 돌린 전각 명부전이 있다.  앞쪽으로 돌아와 본다.  1840년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익공은 머리 둘 내맨 이출목으로 처리했다.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시고 좌우에 무독귀왕과 도명존자를 협시로 봉안했다.

 

 

 

 

그리고 양쪽 벽 따라 시왕들이 앉아 있다

 

 

 

 

사람이 죽어 명부에 오면 지옥으로 보낼지 극락으로 보낼지를 판결하는 판관들 이다.

 

 

 

 

  명부전엔 대개 코믹한 모습의 금강역사(인왕) 한 쌍이 지키고 있다...

 

 

 

 

 

 

 

 

 

 

 

 

 

 

 

 

 

 

 

 

 

 

 

 

 

 

 

  

 

 

 

 

명부전 편액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 선생 글씨다...

 

 

 

 

 

◯  운문사 칠성

 

 

 

별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것은 우리 나라에 한한 것이 아니고 세계 각처에 상당히 보편적이다.

이러한 천체 신앙이 불교 신앙과도 합쳐져서 사찰 속에 칠성각을 마련하고 칠성신을 모시게 된 것이다.

칠성각에는 북두칠성을 인격화해서 앞 이마에 각기 별을 상징하는 둥근 광채를 나타내고 있는 일곱 사람의 점잖은 남자 그림으로 모시거나 일곱 분의 조상(彫像)으로 모시고 있다.

 

 

 

 

칠성각에는 불교에서 북극성을 뜻하는 치성광여래의 탱화를 봉안했다.  도교에서 유래한 민속 칠성신앙을 불교에서 받아들여 모신 전각으로  삼성각,   산신각이라도 한다.

 

 

 

 

민간에서는 칠성 기도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

 

칠성 기도의 의의

비를 내리는 신으로서 물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인간의 건강과 수명 연장을 관장한다.

특히 어린 아기의 명을 길게하고 건강을 지켜 준다.

재물과, 재능에 관한 것을 관장한다.

산신(産神)과도 관계가 있으며 생남(生男)을 관장한다.

 

칠성 기도 예절

모든 의식 절차와 예절은 신중 기도와 같다.

다만 칠성기도의 주력(呪力)은 칠원성군(七元星君)이다.

급한 용무가 있거나 절에 잠깐 다녀갈 때는 삼배만 올리고 가도 좋다.

칠성님께 올리는 적당한 시간은 사시 공양 다음이다.    이때만은 기도를 피한다.

 

 

 

 

왼쪽으로 산신탱이...

 

 

 

 

오른쪽으로는 독성탱이....

 

 

 

 

 

 

 

◯  운문사  원응국사비 ( 보물 316호 )

 

 

 

 

 

 

칠성각 앞에 서서 왼쪽을 보면 비각 셋이 서 있는데,   그중 가운데 비각에 운문사 제3 중창주 원응국사(1052~1144)를 기리는 비를 모셨다.

운문사 제1 중창주는 세속오계로 유명한  원광국사(558~638)이고,    통일신라 말에 작갑사를 다시 세워 태조 왕건으로부터 운문사라는 절 이름을 받은 2대 중창주가 보양국사다...

 

 

 

 

 

운문사는 고려 인종 때 원응국사가 다시 일으켜 세우면서 전성기를 맞는다.   나라로부터 토지 200결과 노비 500명을 받아  나라의 500 선찰(禪刹) 중에 제2 선찰이 된다.

보물 316호 원응국사비는 입적 이듬해인 1145년  윤관 장군의 아들이자 재상을 지낸 문사 윤언이가 짓고  글씨는 고려 제일 명필로 꼽히는 대감국사 탄연이 썼다

 

 

 

중간 비각이 고려조 중기 송나라에 가서 화엄을 전하고 천태교관을 배워 귀국한  고려 스님 원응국사의 업적과 행적을 기록한 적은 빗돌이  원응국사비 이다...

 

 

 

◯  운문사 만세루

 

 

 

 

 

운문사 만세루는 세상에서 가장 넓은 곳이다.  

어린아이들은 이곳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사미니들은 이곳에서 북치는 법을 배운다.   행자들은 이곳에 슬쩍 걸터 앉아 다리품을 쉬어 간다.   때론 메주와 무말랭이가 내걸리고,   삼월삼짇날 즈음이면 막걸리를 24말이나 들이키고 적당히 취해 오체투지하던 ‘처진소나무’가 날려 보낸 송홧가루도 쌓인다.

 

 

 

 

 

 

 

 

 

정면 일곱 칸,   측면 네 칸의 익공계 팔작지붕 집으로,   마루 넓이가 164평이나 된다.  조선 중기 17세기에 지은 것으로 짐작하고  사찰 누각 중에 가장 크다고 하는데   아예 창호를 달지 않고 사방이 툭 트여 있다

 

 

 

 

 

 

 

 

 

 

 

 만세루 마루 너머 대웅전 마당과 대웅보전이 액자 그림처럼 보인다....

 

 

 

 

벽이 없으니 바람은 자유롭고,  품이 넓으니 새로 선 대웅전마저 안아 버린다.   운문사 만세루는 세상에서 가장 큰 법당이다.

 

 

 

 

 

 

 

 

 

 

 

운문사 명물 처진소나무 아래 부처의 설법 모습을 담은 불화인데 제자들 대신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이 설법을 듣고 있다.  '신 영산회상도'라고 할까?

격식을 벗어나 지금 대중의 마음을 파고드는 이런 불화가  좋다.  이 불화가 말하듯 운문사는 비구니 사찰답게 어린이 불교 교육에 힘써 여름 어린이 학교,  일요 어린이 법회와 함께  유치원도 운영하고 있다

 

 

 

 

 

 

 

 

서쪽 가운데 한 칸만 판벽으로 막아  놓았다.   원래 벽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고 불화를 그려 놓으려고 막은 것 같다.  동쪽 마루 끝엔 법고가 놓여 있다.

 

 

 

 

들보 위에 세워 마루도리를 받치는 대공도 보인다. 연꽃은 없고 덩굴무늬만 썼다.

 

 

 

 

 맨 위 종도리가 교차하는 지점에 벌집 같은 게 늘어뜨려져 있다.

 

 

 

 

 도리에 올라 앉은 봉황은 물론이고 용머리처럼 들보 머리를 봉황으로 삼은 것도 있다.

 

 

 

 

서까래 사이로 산자가 그대로 보인다.  산자란 서까래 위에 기와를 얹기 위해 가는 오리나무나 싸리나무,   장작을 새끼로 엮어 댄 것을 가리킨다. 

 

 

 

 

 창방과 장혀 사이엔 화반을 얹어 보강했다 

 

 

 

 

  들보마다 별지화가 그려져 있다. 

 

 

 

 

서까래를 파란 빛으로 칠해 허공을 가로 지르는 들보며 도리 같은 가구들의 빛 바랜 단청과 어우러졌다.  아래 쪽에서부터 창방과 들보와 중량과 동자주와 중도리가 사방으로 엇갈리며 지붕을 떠받치는 모습도 재미나다..

 

 

 

 

사람이 들어간 산수화도 보인다

 

 

 

 

연꽃과 덩굴 무늬를 간결하게 새겼다.

 

 

 

 

 천장이 재미나서 한참을 이리저리 뜯어봤다.....

 

 

 

 

봉황이다.  바깥 익공에 보머리 장식으로 쓰인 건 자주 봤지만 이렇게 실내 도리 위에 올라앉은 건 처음 본다.   전각 안엔 대개 용이 많던데 용은 거의 안 보이고 봉황만 많다.

 

 

 

 

소꼬리처럼 굽은 나무를 쓴 우미량도 보인다...


 

 

 

 기둥과 들보가 교차하는 위에 꼬리 같은 게 보인다.

 

 

 

 

불교와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온 상상 속 새 봉황은 불교뿐 아니라 민속 상징이 된 지 오래 됐다.  새 중에 왕은 봉황이요,   꽃 중에 왕은 모란이요,  백수의 왕은 호랑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상서로운 봉황이 한번 나타나면 천하가 태평하다고 했다.  그래서 임금의 상징부터 오늘날 대통령 휘장에까지 봉황이 들어가 있다. 


 

 

  

절 중심영역에 드는 누각 이름으로 가장 많이 쓰는 것이 만세루다.   대개 법회를 열거나 강당으로 쓰이는 '만세'는 지금의 복락이 영원히 가기를 비는 말이어서 불교 보다는 도교나 유교 정서가 강한데 어떤 연유로 절 누각 이름으로 많이 쓰는지 궁금하다. 

 

 

 

 

 

 

  

운문사의 으뜸 이미지는 ‘정갈함’이다. 경내 마당 비질 자죽과 밀짚모자를 쓰고 울력을 하는 비구니들의 쉼 없는 움직임은 풍경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기도 하다. 전각 앞이나 옆 댓돌에 놓여 있는 신발들은 가지런하고, 여기저기 놓인 화분들은 철 따라 꽃을 바꾼다.

 

 

 

 

 

 

 

 

 

 

 

 

 

 

 

 

 

 

 

 

 

 

 

 

 


 

◯  운문사 처진 소나무 ( 천연기념물 제180호 )

 

 

 

 

 

울타리 둘러친 안에 가부좌 틀듯 가지를 넓게 편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가지가 밑으로 늘어지는 처진소나무 중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운문사 처진소나무(천연기념물 190호)다.

키 6m, 줄기 둘레 3.5m이고 나이는 500살을 넘었다.   사람 손을 대거나 다듬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둥글게 가지를 펴는 나무도 드물다고 한다. 

 

 

 

 

운문사 앞뜰의 처진 소나무가 무거운 생각에 겨워 긴 팔을 늘어뜨리고 있다.   내 마음을 눈치 챈 듯하다.   이 소나무는 500여 년 전 어느 고승이 시든 나뭇가지를 꺾어 심은 것이 세월의 풍상을 딛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영웅의 일생을 닮았다.   장엄한 수형 덕에 천연기념물이 된 처진 소나무의 위풍은 단연 압권이다.  봄,  가을 한 차례 스님들이 공양하는 막걸리 한 말씩을 마시는 호사를 누리기도 한단다.  스님들의 정성에 보답이라도 하겠다는 듯 몸짱(?),  얼짱(?)의 푸른 자태로 방문객의 발길을 끊이지 않게 하고 운문사 경내 가득 초록물결을 출렁이게 한다.

 

 

 

 

처진 소나무....  가지가 처지면서 자연스럽게 둥근 모습으로 자란다고 한다.

 

 

 

 

 

 

 

 

소나무의 한 품종인 처진소나무는 가지가 밑으로 늘어지는 점이 보통 소나무와 다르다고 한다. 수령이 500여 년 정도되고 어떤 고승이 소나무 가지를 꺾어서 심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소나무 밑에서 본 나무줄기..  지지대로 가지를 받쳐주고 있다.

 

 

 

 

 

 

  

경내에서 또 한가지 눈길을 끄는 것은 천연기념물 180호 ‘처진 소나무’. 수령 500년이 넘는 이 소나무는 가지를 모두 땅에 내려놓고 있는데 상한 솔잎 하나 찾기 힘들 정도로 사철 싱싱하다. 절에서는 스님들이 해마다 봄·가을에 각각 막걸리 12말씩을 보시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  운문사 법륜상

 

 

 

 

둥그런 윗단의 선박 키처럼 여덟 갈래로 난 것은 불자들이 지켜야 할 여덟 가지 생활 실천 윤리,   팔정도를 의미 한다.

 

 

 

 

 

 

 

 

 

 

 

 

 

 

 

 

 

 

 

비로전과 만세루 사이 약수터 곁에 둥근 석조물이 있다.   아랫단 빙 둘러 사슴이 새겨져 있는 것은 부처님이 처음으로 설법한 동산 녹야원(鹿野苑)을 상징한다.

 

 

 

 

 

 

 

 

법륜상이다.부처님의 가르침이 한 곳에 머물지 않고수레 바퀴 굴러가듯 언제 어디서나 전해지는 것을 뜻한다.   불기 2532년이니까 1988년에 세웠다.

 

 

 

 

 

 

 

 

 

 

◯  운문사 감로수

 

 

 

 

 

 

 

 

 

 

 

 

 

 

 

 

 

 

 

 

 

 

 

 

 

◯  운문사 스님 수행공간

 

 

 

 

절 남쪽 절반은 비구니 승가대학과 요사가 있어 일반인 출입을 금한다.   작압전 지나 왼쪽으로 요사공간 들어서는 문 이름이 불이문 이다.

대개 절 중심영역으로 드는 마지막 산문 이름으로 쓰는데  운문사에선 교육공간 들어서는 문 이름이어서  비구니 학승들에게 하나뿐인 진리를 좇아 열심히 공부하라는 뜻으로 붙인 듯 하다.

 

 

 

 

불이문(不二門)이다.   출입금지 지역이다.   

불이문이라는 것은 ‘진리는 둘이 아니라는 뜻’에서 유래한다.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고,   생과 사,   만남과 이별 역시 그 근원은 모두 하나이다.   이 같은 불이(不二)의 뜻을 알게 되면 공부가 끝나는 것이다.

 

 

 

 

청도 운문사에서  우리가 꼭 놓치지 않고  보아야  할것이  하나 있다.   그것이  바로   운문사의  부엌이다.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이 있었다..

 

 

 

 

 

 

 

운문사는 비구니 스님들이 공부하고 꾸리는 절이어서  여느 절보다 곱고 잘 다듬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중 하나가 불이문 양쪽으로 둘러친 돌담이다.

마구리에 매화점 찍은 서까래와 지붕까지 올린 돌담은  작고 납작한 돌만 골라 좌우로 어슷하게 교차해 쌓았다.  여간 손품이 든 것 같지가 않은데 비구니 학승들이 절 옆 약야계에서 일일이 손으로 나른 냇돌들이라고 한다.

 

 

 

 

 

 

 

 

 

 

 

 

 

 

 

 

 

 

칠성각과 비각 사이에 서서 남쪽을 보면  금단 구역인 비구니 강원과 생활공간이 있다.  운문사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비구니 승가대학이 생기기까지  내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제는 강점기에 우리나라 절에 일본 불교를 이식하려고  결혼해 가정을 꾸리는 대처승을 많이 뒀다.

운문사는 광복 후 1954년까지도 대처승이 주지였다고 하는데  그러다 불교정화 운동이 일어 나면서 대처승들이 쫓겨나는 절이 많았고  영남 일대 비구니 스님들도 정화운동에 세운 공을 인정받아

1954년 대구 동화사를 비구니 사찰로 받게 된다.

그러자 비구들이 본사인 동화사를 비구니에게 내주는 것은 과하다고 반대해 비구니들이 1년 만에 옮겨온 곳이 동화사 말사였던 운문사였다.

 


 

 

 

 

 

 

 

 

 

 

운문사 스님과 학인들은 하루 중 일정한 시간을 공동노동,   울력에 쓴다.   철 따라 모내기,  김매기는 기본이고  날이 궂어 들에 나가지 못하는 날에도 하다 못해 쌀이나 콩의 뉘와 돌을 고르는 일을 한다.  연약한 여인들이 어떤 비구 절 보다 엄한 규율과 노동 속에 생활하는 모습이 반듯한 한편으로 한 구석 연민이 솟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죄송합니다....  스님...

 

 

 

 

 

 

 

 

운문사는 1958년 비구니를 키워내는 강원을 창설했고  1987년 4년제 승가대학이 된다.

1997년엔 비구니 강사를 양성하는 승가대학원까지 설립해  우리나라 최대이자 가장 학풍이 엄격한 비구니 교육 도량이 된다.  운문 승가대는 그간 2천여 비구니를 배출했다고 한다.

출가 후 행자 생활을 하는 예비 승려 사미니들이 입학해 함께 살며 공부해 졸업하면 스님이 되는 비구니 계(戒)를 받는다.

경전 공부 외에 영어 컴퓨터,   피아노,   서예,   요가,  꽃꽂이도 선택해 공부해야 하고  학문과 노동을 겸하는 자급자족도 해야 한다.

 

울력을 마치고 오는 듯한 차림으로 승가대학생 두 분이 강원 공간으로 들어선다.....

 

 

 

 

이곳에서 비구니 스님들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청규를 엄격하게 실천하고 있다. 세속과 떨어진 여승들이 수도하는 도량답게 절집의 품은 가지런하고 정갈하다.

 


 

 

노동은 정진과 함께 절을 받치는 두 기둥이다.

1958년 비구니를 키우는 강원이 들어선 이래 운문사는 '일하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기풍을 철저히 지켜 온다.

모내기부터 추수,  갈무리까지 농사를 지을 뿐 아니라 이렇게 돌담 쌓기도 거든다.

담이야 기술을 지닌 토담장이가 쌓았겠지만 개울가에서 냇돌을 날라온 것은 비구니 스님들이었다고  한다.  이 고운 돌담이 여린 스님들의 울력의 소산이라고 생각하니 더 곱게 보인다.

 

 

 

 

 불이문 양쪽으로 둘러친 여러 모양의 담장, 돌담

 

운문사에서는 돌담과 기와장담 모두를 볼 수 있는데 돌담은 돌과 돌이 서로를 지탱하면서 맞물려 쌓은 형태인데 담장이 뜨개 옷을 입은 듯 보이고 기와 장담에서는 단조로운 무늬를 미소 디자인을 넣어서 한층 더 정감있게 보인다

 

 

 

 

이곳 운문사에는 국내 최대의 비구니 도량답게 소박하고곳곳에 흐트러짐 하나 없는 단아함이 배어있다. 이 담장에 쓰인 돌 역시 스님들이 한 장 한 장 나르고 다듬은 것일  것이다.


  

 

 

 

 

 

 

 

 

 

 

 

 

◯  운문사 불교 용품점

 

 

 

 

 

 

 

 

 

 

 

 

 

 

 

 

 

 

 

 

 

 

 

 

 

 

 

 

 

 

 

 

 

 

 

 

 

 

 

 

◯  운문사 전경

 

 

 

 

 

 

 

 

 

 

 

 

 

 

 

 

 

 

 

 

 

 

 

 

 

 

 

 

 

 

 

 

 

 

 

 

 

 

 

 

 

 

 

 

 

 

 

 

 

 

 

 

 

 

 

 

 

 

 

 

 

 

 

 

 

 

 

 

 

 

 

 

 

 

 

 

 

 

 

 

 

 

 

 

 

 

 

 

 

 

 

 

 

 

 

 

 

 

 

 

 

 

 

 



 

 

 

 

 

 

 

 

 

 

 

 

 

 

 

 

 

 

 

 

 

 

 

 

 

 

 

 

 

 

 

 

 

 

 

 

 

 

 

 

 

 

 

 

 

 

 

 

 

 

 

 

 

 

들머리 길게 이어지는 진입로 소나무들의 장한 행렬을 뒤로 하고 운문사를 내려 간다.. 

 

 

 

 

 

 

 

 

 

 

 

 

 

운문사 경내를 벗어날쯤  언제가 읽었던... '산중암자' 저자 '정찬주' 교수님 글이 문득 떠오른다.

'산중암자에 가면 시인이 되는것 같다.

 감성이 풋풋해지고

 젊은 시절처럼 정신의 날이 선다.

 메마른 가슴이 촉촉해지고,

 눈에 보이는 것이 다 꽃으로 보인다.

 귀로 듣는 것이 다 노래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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