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분황사
분황사
2014. 5. 13.
2014. 5. 13. 오늘은 인근 경주를 추억의 수학여행을 떠올리며 다녀 본 경주 여행길이다... 먼저 분황사 부터 둘러 본다... 매표소와 분황사입구. 원효대사의 발자취!!! 분황사다.... 분황사(芬皇寺)는 경주시 구황동 312번지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이다. 분황사는 황룡사지와 잇닿아 있으면서 국보 제30호로 지정돼 있는 모전석탑으로도 유명하다. 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고승 원효와 자장이 거쳐간 사찰로 명성이 높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분황사 모전석탑과 화쟁국사비적, 삼룡변어정(8각 석정)이라는 우물, 도지정 문화재자료 제319호로 지정된 약사여래동상 등이 있으며 석등과 대석 같은 많은 초석들과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 모양의 돌들이 한켠에 단정하게 쌓여 있다.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되었으며, 원효와 자장이 거쳐간 절이다. 자장대사는 643년에 당나라에서 대장경의 일부와 불전을 장식하는 물건들을 가지고 귀국하여 분황사에 머물면서 수행 정진을 하였으며 원효대사는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금광명경소>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분황사 창건 당시의 가람배치는 탑을 앞에 두고 법당이 '품(品)'자 모양으로 지어졌는데 신라시대의 1탑 3금당 양식은 이 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 분황사 모전석탑 (국보 30호)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 현존하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분황사 모전석탑이라고도 부르며, 원래는 9층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3층만 남아 있고 높이는 9.3m이다 신라 최초로 만들어진 분황사 모전석탑은 안산암을 벽돌모양으로 깎아 만들어 쌓았는데 원래 9층이었지만 지금은 3층만이 남아 있고 이 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 전시되어 있다. 분황사모전석탑 감실 정면 임진왜란 때 크게 훼손되었다고 하며, 지금의 모습은 1915년 일본인들에 의해서 수리 복원된 것이다.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각 방향마다 탑신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고, 그 문을 지키고 있는 금강역사들이 한쌍씩 자리하고 있다. 634년(선덕여왕 3) 분황사 창건과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1단의 석축기단을 만든 다음, 그 중앙에는 1단의 화강암 판석(板石)을 밑에 깔고 안산암(安山岩)을 벽돌 모양으로 잘라서 탑신을 쌓아올렸다. 1층 4면에는 감실(龕室)을 만들고 그 좌우에 인왕상(仁王像)을 각각 1구(軀)씩 새긴 화강암을 끼웠다. 이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탑의 옥개(屋蓋)는 전탑(塼塔)을 닮아 상하에서 단층(段層)을 이룬다. 규모도 크지만 2층과 3층의 탑신이 1층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어 더욱 장중한 감이 느껴진다. 그 모양이 전탑을 따르고 있어, 백제 석탑이 목탑(木塔) 양식을 따르고 있는 것과 대조를 이루며, 신라 석탑의 발달사를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문화재이다. 지붕돌은 아래윗면 모두 계단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솟은 꽃장식이 놓여 있다.
1층 몸체의 사방에는 쌍여닫이 돌문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감실이 있고 감실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仁王像)을 힘찬 모습으로 양각(陽刻)으로 조각해 놓았다.
선덕여왕때 7- 9 층으로 지어진 모전 석탑인데 지금은 3층만 남아 있다.
이 돌사자는 받침돌도 없고 앞발도 두개 다 잃었다. 하지만, 제일 늠름해보인다 ...
자연석으로 된 네 모퉁이 기단 위에는 화강암으로 조각된 네 마라의 석사자(石獅子)가 앉아 있다.
◯ 분황사 석정
모전석탑 뒤에는 신라 호국용(護國龍)의 설화(說話)를 간직한 석정(石井)이 있다.
분황사에는 신라시대의 우물 중 가장 아름다운 8각형의 석정 (돌로 만든 우물) 이 있다
이 것은 호국룡변어정(護國龍變漁井)이라고도 불리는 신라시대의 유물이다.
우물틀의 외부는 높이 70cm의 8각이고, 내부는 원형인데 이것은 불교의 팔정도(八正道)와 원흉의 진리를, 우물안 4각형 격자는 불교의 근본 교리인 사성체(四聖諦)를 뜻한다.
'호국삼룡변어정(護國三龍變漁井)' 으로 불리는 이 우물에 얽힌 전설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지금까지 전해져오는데 분황사 우물과 금학산 기슭 동천사의 동지와 청지라는 우물에는 각각 통일신라를 지키는 세 마리의 호국룡이 살고 있었다.
원성왕 11년(795), 황제의 비밀 지령을 받은 당나라 사신이 신라에 들어와 이 용들을 물고기로 변신시킨 후대나무통에 숨겨 잡아가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이들이 용을 잡아갈 수 있었던 것은, 북천의 물이 불어나 왕이 되지 못했던 김주원 후손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나라 사신들이 용을 잡아 떠난 그날 밤, 원성왕의 꿈에 두 여인이 왕 앞에 나타나 "우리는 청지와 동지에 사는 용의 부인인데 당나라 사신들이 우리 남편을 잡아가고 있으니 다시 데려다 주소서" 라고 아뢰었다. 이에 원성왕은 군사를 풀어 귀국하던 당나라 사신을 붙잡아 용을 데려오고 이들을 도와준 김주원의 후손 일당을 처형하였다. 다시 우물에 돌아 온 용은 신라를 지키는 호국용으로 살게 되었다"고 한다.
우물의 내부
안전을 위하여 철망을 쳐 놓았고 철망 아래로 장대석으로 만든 사각형의 모양이 보인다.
현재는 관광객들의 안전을 위하여 우물 내부에 철망을 설치하여 놓았지만 고인 물은 아직까지 식수로 가능하다고 한다
◯ 분황사 보광전(普光殿)
법당은 달랑 이거 하나 뿐이다.
◯ 분황사 보광전 약사여래입상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9호)
경덕왕 14년(755), 3개의 금당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본피부(本彼部)에 사는 강고내말(强古乃末)이 무게 30만 6,700근이나 되는 약사여래입상을 만들어서 봉안하였으나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이 약사여래불은 없어지고 현재 보광전에 봉안되어 있는 약사여래불상은 1609년에 구리 5,360근으로 조성되었다.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의 분황사 보광전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모든 중생의 질병을 구제해 준다는 의미의 약사여래불이다.
원래 분황사에는 무게 30만 6700근의 동(銅)으로 만든 신라 최대의 불상인 약사여래좌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1998년에 불상이 있는 보광전을 고쳐 짓기 위해 해체하던 중 발견된 기록을 통해 분황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탔으며 현재의 불상은 1609년에 동 5360근으로 만들었고 보광전은 1680년 5월에 다시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
불상의 왼손 위에 놓인 약그릇 뚜껑 안쪽에 ‘건륭(乾隆) 39년 을미(乙未) 4월 25일 만들었다’ 는 기록이 있지만, 건륭 39년은 을미년이 아니라 갑오년이기 때문에 이 기록을 사실대로 믿기는 어렵다.
불상의 얼굴은 둥글고 육감적이어서 세속적인 느낌을 주며, 때로는 어린이의 얼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두껍게 입고 있으며, 옷주름의 표현은 다분히 형식적이다. 손에는 약그릇을 들고 있어서 약사불임을 확인할 수 있다
원효(元曉)가 이곳에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썼고,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은 신화(神畵)로 일컬어졌다. 또한 절의 좌전에 있었던 천수대비(千手大悲) 벽화는 매우 영험이 있어서 눈 먼 여자 아이가 노래를 지어 빌었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고 전한다.
약사불
◯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 분황사 대종각
◯ 분황사 야외 유물들..
야외 유물들이다
석등과 대석 같은 많은 초석들과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 모양의 돌들이 한켠에 단정하게 쌓여 있다.
분황사를 둘러 보고 인근의 황룡사지로 향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