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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소사(전북 부안)사찰여행/전라도 2013. 3. 13. 09:26
내소사
2013. 3. 13.
2013. 3. 10. 변산마실길 걷고 난뒤 들러본 내소사..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쉼없이 달려온 2013년도 3월하고도 10일인 지금....
나는 잠시 멈추어 본다.
그리고.... 이곳....
내소사에 머무르다.............
변산(邊山)은 예로부터 '능가산'이라고도 불렸다. 석가모니 부처가 불교경전 '능가경'을 설했다는 ' 능가성'에서 전해온 이름, 그 능가산 아래에 내소사(來蘇寺)가 있다.
내소사 전경
내소사(來蘇寺)의 원래 이름은 소래사(蘇來寺)였다. 즉, '다시 태어나 찾아온다..'는 뜻이다. 633년 백제 무왕 때에 혜구(惠丘)가 창건한 이래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성종(成宗) 때 간행된 "신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기까지도 소래사(蘇來寺)이었다. 그러던 것이 조선 인조(仁祖) 1633년에 청민선사(靑旻禪師)가 중건할 때 쯤에 내소사(來蘇寺)로 바뀌었는데 그 이유는 확실치 않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대승경전 '능가경'을 설했다는 능가산 ... 능히 모든 마장(魔障)을 끊고 해탈에 이를 수 있다 ... 는 의미가 담긴 불가의 마음 속 성지(聖地)이자 길지(吉地)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내소사(來蘇寺)의 주봉인 관음봉이 '능가산'이라 불리면서 이 내소사는 ' 능가산 내소사 '로 통하게 되었다.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1300년 고찰 내소사(來蘇寺)에 ' 내생(來生 .. 다음 세상)에 반드시 소생(蘇生)하리라 '는 창건주의 절절한 원(願)이 서려있음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아마도 불교에서 말하는 내자개소(來者皆蘇)에서 따온 이름일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즉, 부처님의 도량인 이 절에 오는 모든 사람은 소생하리라... 이는 불교의 모든 생명의 윤회전생설(輪廻轉生說)에서 나온 말이다. 모든 중심이 사집(邪執), 유견, 번뇌(煩惱), 업(業) 등으로 인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 죽어서 다시나고 또 다시 죽으며 생사를 끊임없이 반복하여 가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내소사 일주문 입구에 900살이 넘는 할머니 당산나무가 나그네들을 반긴다.
정월 보름날이면 내소사 스님들과 마을 사람들이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할아버지 당산나무 옆에는 천하대장군과 천하여장군도 있었다...
○ 내소사 일주문
비스듬히 세워진 一柱門
일주문의 서 있는 각도(角度)가 비틀어져 있다. 대수롭지 않게 지나칠 수고 있지만, 공간의 내부를 신비롭게 또는 호기심이 나게 유도하는 건축적 사고의 한 반영일 것이다
'능가산 내소사' 현판 일중 김충 書
속세의 경계선을 넘어 절집 문턱을 넘는다.
○ 내소사 전나무 숲길
회림삼경 檜林三景
이곳 내소사 초입 바닷가의 얕은 산세에서 보기 어려운 바위봉우리 우뚝한 산세가 눈맛을 시원하게 한다. '능가산 내소사'라 쓰여있는 일주문을 들어서면 눈 앞에 펼쳐지는 전나무 숲길이 장관이다. 이 내소사 입구 전마루 숲길은 솔바람 소리에 전나무 사이로 내리는 비(松風檜雨), 사월의 신록(四月新綠) 그리고 겨울의 눈꽃(冬期白花)으로 표현되는 전나무 숲 삼경(檜林三景)으로 변산팔경 중 하나로 꼽힐만큼 아름다운 숲길이다.
전나무 숲의 한낮 풍요로운 태양과 새 소리, 물 소리, 바람 소리는 절을 찾는 이의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비포장 흙길의 부드러움과 전나무 숲의 울창함에 마음을 빼앗긴 채 가다가 마지막 숲길을 벗어나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사찰 경내의 장엄함에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병풍처럼 둘러싸인 능가산의 산세(山勢)가 기상이 넘치고 있다.
전나무 숲길
내소사(來蘇寺) ...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고 다시 복구하는 일이 계속되었으나, 입구가 여전히 삭막하였다. 이러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150여 년 전, 일주문(一柱門)에서 사천황문에 이르는 길에 전나무를 심었다. 6.25 한국전쟁 당시에도 절은 피해를 입었지만 입구의 전나무들은 다행히 무사했다. 3~40m는 될 듯한 전나무숲은 너무나 울창하여 햇볕이 내려쬐는 한여름에도 서늘한 가을이 된다. ' 아름다운 숲'과 ' 한국의 아름다운 길 '에 선정된 내소사 전나무 숲길이다
내소사 일주문에 들어서면 울창한 전나무숲이 펼쳐진다. 150년 정도 된 전나무 500그루가 약 600m가량 이어진 숲길이다.
나무는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어 그 높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한낮의 햇살조차 숲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고 나무 등걸에 잠시 얹혔다 지나갈 뿐이다.
내소사는 들어가는 길부터가 굉장한 볼거리인데 경내입구까지 510m 반경에 약 600여 미터의 전나무숲길이 조성되어 있어 세속의 잡념을 털어버리기에 좋은 산책로이다.
맨발체험장..
일주무(一柱門)을 들어서는 순간,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전나무 숲길이 반듯하게 뻗어 앞서가는 사람이 꼬마의 키가 된다. 늘씬하게 뻗어오른 전나무 옆으로는 여러 잡목들이 뒤엉키어 숲길은 더욱 호젓하고 한걸음 내딛고는 심호흡 한번 고개 들어 하늘을 올려 보고...
○ 내소사 벗꽃길
600m에 이르는 전나무 숲길이 끝나면 능가산의 아리따운 바위들이 고개를 내밀고, 길은 다시 벚나무 가로수를 양 옆에 끼고 천왕문(天王門)까지 우리를 그 쪽으로 인도한다.
대장금에서 이영애. 지진희의 애틋함이 있는 연못
연지
전나무 숲길이 끝나면 천왕문 까지 조성된 벗나무길
관음봉을 배경으로
능가산
학(鶴)의 날개를 펼친 것처럼 지어 놓은 내소사 대웅보전(大雄寶殿) 뒤에 보이는 산이 능가산이다.
'능가'라는 표현은 범어(梵語)에서 그곳에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험절(險絶)한 곳이며, 가기가 어려운 난왕(難王)이므로 가외(可畏)한 곳을 말함이다. 불교에서는 부처님께서 능가산에서 설한 경전이 '능가경'이며 인도 남해안 마라야산(摩羅耶山) 꼭대기에 있는 성(城) 이름이 '능가성'이다. 내소사가 있는 주산(主山)이 바로 능가산이다.
고목이된 벗나무 숲을 지나 천왕문으로 살짝 더 다가선다.
관음봉
관음봉을 바라보며 벗꽃길을 지나면 천왕문으로 그 좌우에 앙증맞고 야트막한 토담이 앞을 막고 있다. 담은 밖과 안을 단절시키지만, 내소사의 담은 그리 높지 않은 담으로 안 경내를 볼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예술이 있는 담으로 단절감보다는 중생을 끌어안은 따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 내소사 천왕문
사천왕상을 봉안하기 위한 건물로서 사찰 경내 출입문의 역할도 겸하고 있으며, 17평의 목조 한와 팔작지붕으로 1986년에 우암 혜산선사가 신축하였다.
편액은 일중 김충현 거사의 글씨이고 주련글귀는 해안선사의 오도송(悟道頌)이다.
천왕문 天王門
사찰의 입구에 있는 일주문(一柱門) 다음의 문이다. 일주문을 지나 깨달음을 갈구하며 길을 가는 求道者에게 다다라야 할 부처의 세계는 눈에 아직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이 가야 할 길만이 앞에 놓인 상황에서 구도자들은 쉽게 갈등을 겪게 될 것이다. 이쯤에서 보이는 것이 천왕문이다.
천왕문에 있는 사천왕(四天王)은 이곳에서 구도자들을 맞이한다. 이들은 그 길을 지키면서 힘겨워하는 중생들에게 다시 한번 정진을 위한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 주고, 마음 속에 아직 남아있는 번뇌를 떨쳐내도록 무서운 모습을 하고 서 있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청정도량인 사찰을 雜스러운 것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고, 신성한 佛法을 지키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천왕문은 금강역사와 더불어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外護神)인 사천왕을 모신 전각이다. 외호신이란 불국정토의 외곽을 맡아 지키는 神이라는 뜻이며, 東. 西. 南. 北의 네 곳을 지키게 된다. 이를 4대천왕(四大天王), 사왕(四王), 호세사왕(護世四王)이라고도 한다.
'천왕문' 현판글씨는 일중 김충현님이 쓰셨다...
지국천왕 持國天王
東쪽을 지키며 손에 칼을 들고있고, 인간의 감정 중에서 기쁨의 세계를 관장하고, 계절 중에는 봄을 관장한다.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향기만을 맡는다는 음악의 神인 건달바와 부단나의 神을 지배한다. 동쪽을 상징하는 靑色을 띄고있고, 역할은 善한 이에게는 福을, 惡한 이에게는 罰을 주는 역할을 한다.
증장천왕 增長天王
南쪽을 지킨다. 손에는 용과 여의주(如意珠)를 들고 있으며, 사랑의 감정을 관장하고 계절 중에서는 여름을 관장한다. 구반다(사람의 정기를 빨아 먹는 귀신이며 말머리에 사람의 몸을 취하고 있다)와 아귀의 신을 지배한다. 남쪽을 상징하는 赤色을 띄고 있으며, 역할은 만물을 소생시키는 덕을 베풀어 준다.
광목천왕 廣目天王
西쪽을 지킨다. 손에 삼지창과 보탑을 들고 있으며, 노여움의 감정의 세계를 관장하고, 계절 중에는 가을을 관장한다. 용과 비사사(혈육귀)의 신을 지배한다. 얼굴색은 白色을 띄고 있고, 역할은 악인에게 고통을 주어 求道心을 일으키게 한다.
다문천왕 多聞天王
北쪽을 지킨다. 손에 비파를 들고 있으며 즐거움의 세계를 관장하고, 계절 중에는 겨울을 관장한다. 야차와 나찰의 세계를 지배하며 얼굴색은 흙색을 띄고 있고, 역할은 어둠 속을 방황하는 중생을 구제한다.
금강역사가 守護의 의미를 가진다면 사천왕은 여기에 더하여 인간을 보살피고 만물을 소생시키며 福樂을 나누어주는 역할까지 담당한다. 방위에 따라 靑. 白. 赤. 黑의 얼굴색을 가지고 있는 사천왕은 불교에서 말하는 33개의 하늘 중 여섯번째 하늘인 사천왕천(四天王天)의 지배자이다.
사천왕문에서 바라본 대웅전 앞 전경이다
내소사는 근래에 손을 많이 본 절집이다. 그러나 손을 대면서도 어느 절처럼 화려함이나 요사스러움을 드러내지 않고 내소사의 원형을 다치지 않게끔 단정한 가운데 소탈한 분위기를 살려내고 있다. 그 것 또한 끝끝내 지켜오는 소중한 아름다움의 실천인 것이다.
내소사는 한 번에 시선에 들어오지 않는다. 조금씩 친근감을 가지고 다가오는 절이다. 위용을 자랑할만한 산세도 아니고 적당한 높이로 둘러친 능가산은 그저 듬직하다. 뽐내지도 기죽지도 않은 능가산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뒤로 둘러싼 경내로 들어서면 절 안은 야트막한 축대와 계단이 몇 차례 거듭되면서 조금씩 높아지며 우리에게 다가온다. 아니 우리가 그렇게 다가가고 있다.
○ 내소사 당산나무
수령 1000년, 수고 20m, 나무둘레 7.5m 인 보호수인 느티나무다.
내소사 절마당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고목나무다.
수령이 무려 1천년이 넘는 이 느티나무가 내소사의 역사를 증명해 준다.
내소사 일주문 입구에의 900살이 넘는 할머니 당산나무가 있는데 이 고목과 할머니 당산나무를 결부시켜 절에서 민속신앙을 숭배하는 것도 특이하다.
내소사(來蘇寺)는 전형적인 평지형 가람인데 참으로 다양한 표정을 지니고 있는 절집이다.
먼저 그 유명한 전나무 진입로는 수직적(垂直的)인 요소로 방문객을 이끈다. 이어지는 벚나무와 단충나무 길에서 수직선(垂直線)은 사라지고 잔잔함이 흐른다. 확연하게 달라지는 풍경이지만 더 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천왕문(天王門)을 들어서면 이내 수평적(水平的)인 요소의 경내를 만나게 된다. 평지형 가람의 시원스럽지만 흐트러짐 없는 경내, 그 리고 마지막으로 그 풍경은 봉래루(逢來樓)의 낮은 하부 공간을 지나 금당(金堂) 마루에 이르면 협소하지만 포근한 내소사의 절정을 이룬다.
내소사는 석축(石築)에 의해 상, 중, 하의 3단으로 나뉘어진다. 하단은 천왕문과 봉래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종각을 배치하였다. 중단은 삼층석탑을 중심으로 설선당과 무설당을 두어 수도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상단은 대웅전과 삼성각 그리고 관심당이 있어 예불의 공간을 이루고 있다.
이 곳 내소사는 근래에 손을 많이 본 절집이다. 그러나 손을 대면서도 어느 절처럼 화려함이나 요사스러움을 드러 내지는 않고, 내소사의 원형을 다치지 않게끔 단정한 가운데 소탈한 분위기를 살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끝끝내 지켜오고 있는 소중한 아름다움의 실천인 것이다. 일부문과 천왕문을 지나 내소사의 앞마당에 이르면 낮아서 편안한 석축이 2단으로 조성되어 있다. 위압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내소사의 속살을 보여줄 듯 말듯 조금씩 보여주면서 우리를 내소사로 이끌고 있다.
○ 내소사 보종각 (보물 제 277호)
보종각
보물 제 277호인 고려동종을 달아 놓은 종각을 말한다. 이 건물은 현 위치에 있기까지 몇곳을 거쳤다. 정확한 건립연대를 알수 없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본래 이 건물은 1880년경 태인에 세워졌으나 어떤 연유에서인지 부안군 상서면 김상기씨의 누각으로 사용하다가 다시 만화동의 구병서씨가 사용하였는데, 1965년 내소사 주지 원경스님께서 이곳으로 옮겨 지었다고 한다. 전에는 법당 앞마당 서남향에 설치되었는데 현 내소사 회주 우암혜산선사가 주지 재임시 현위치로 이건(移建) 하였다.
고려동종 高麗銅鐘 (보물 제 277호)
이 鐘은 고려 고종(高宗) 9년(1222)에 청림사(靑林寺)의 종으로 제작되었으나, 1850년 (조선 철종 원년)에 이 곳 來蘇寺에 옮겨진 것으로 전형적인 고려 후기의 鐘이다. 높이 103cm, 입지름 67cm의 크기이다.
이 동종은 1958년 청림리에 사는 최씨 문중에서 제각을 세우려고 땅을 파다가 이 종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발견 당시 이상하게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종을 쳐서 소리나는 사람이 가져가기로 하였는데, 내소사 스님이 종을 치니 아름다운 종소리가 나서 내소사로 가져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실적인 종뉴(鐘紐) 아래의 종신(鐘身)에는 이중여의두문(二重如意頭紋)의 입상화문대(立像花紋帶)와 화려한 모란당초문(牡丹 唐草紋 .. 덩굴무늬)의 상, 하대(上,下帶)가 있다. 당초문의 乳廓아래에는 4개의 중판연화문(重瓣蓮華紋)이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매우 균형을 갖춘 모습이다. 또한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양각된 삼존상(三尊像)이 있는데, 두 뺨이 볼록한 선정인(禪定印)의 본존은 연화좌(蓮花座) 위에 앉아있고, 좌우협시상(左右脇侍像)은 입상으로 되어 있다.
이들 위에는 운미(雲尾)가 길게 솟아있고, 그 위에는 장식을 흩날리는 보개(寶蓋)가 있어서 한층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처럼 내소사의 동종은 종신형(鐘身形)은 신라시대의 종형(鐘形)을 따르나, 고려 후기의 종의 특징인 立像 花紋帶를 갖추고 있으며, 표면의 묘사 수법은 정교하고 사실적이다. 고려 후기의 종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한다.
종신(鐘身)에는 위 아래에 견대(肩帶)와 구연대(口緣帶)를 돌리고 그 안에 아름다운 당초문(唐草文)을 새겼으며, 견대(견대) 위에는 여의두문(如意頭文)과 흡사한 입화형(立花形) 장식이 있어 고려종(高麗鐘)의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견대 아래 4곳에는 유곽(乳廓)이 있으며, 연주문(連珠文)으로 구획하여 이 유곽 안에 당초문을 새겼다. 그 안에 젖꼭지 모양의 9 돌기(突起)가 있다.
유곽(乳廓) 아래에는 12잎의 연꽃으로 장식된 당좌(撞座)가 원좌(圓座) 밖에 있다. 유곽과 유곽 사이의 밑인 종신중앙부에는 꽃송이 위에 구름을 표현하고 구름 위에 삼존(三尊)이 새겨져 있다. 본존(本尊)은 활짝 핀 연꽃 위에 앉아 있고, 협시상(脇侍像)은 서 있다. 모두 둥근 두광(頭光)을 갖추고 있으며, 운미(雲尾)가 길게 위로 솟아 있다.
그리고 그 구름 위에는 바람에 휘날리는 보개(寶蓋)가 있어 더욱 장엄하게 보인다. 정상에는 주형(珠形)이 달린 용통(甬筒)을 두고, 특히 큰머리의 용뉴(龍紐)가 있는데 모두가 사실적으로 처리되었다. 또 당좌(撞座)와 당좌 사이에는 세 종류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으며, 명문(銘文)에 따르면, 이 종(鐘)은 1222년(고려 고종 9)에 조성되어 원래 청림사(靑林寺)에 있던 것을 조선 철종 4년인 1853년에 이곳 내소사로 옮긴 것이다.
○ 내소사 범종각 (梵鐘閣)
13평의 팔작 한와지붕으로 1995년 당시 주지였던 철산스님이 대범종, 대법고, 목어, 운판등 4물(四物)을 보관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사찰에서는 범종각이나 범종루에 梵鐘, 法鼓, 木魚, 雲판등 4가지를 걸어두고, 타악기처럼 두드려서 소리를 낸다.
예불이나 의식, 식사 시간을 알리는데 쓰이나 상징하는 것은 각각 다르다. 이들 法具들을 불전사물(佛殿四物)이라고 한다.
○ 내소사 봉래루
이 내소사 봉래루(逢來樓)는 대웅전으로 들어서는 마지막 관문이다. 이 봉래루 기둥에 소원을 담은 글귀를 적어 매달아 놓으면 소원을 이룬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봉래루 누각아래 내소사 '관음성지'임을 알리는 표찰이 걸려 있다.
대웅보전의 바로 앞에서 누각과 문의 역할을 하는 봉래루는 1414년(조선 태종1`2)에 건립되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 누각의 맞배건물로 1987년에 복원되었다. 속설에 봉래루는 실상사의 누각으로 1415년에 세웠다가 옮겨왔다고 하나 이를 뒷받침할 자료는 없다고 한다.
봉래루는 자연석을 초석으로 사용하여 원주(圓柱)를 세우고, 그 위에 널마루를 깔아 누각을 올린 모습으로 1층의 막돌초석에서 생긴 변형된 높낮이를 2층 누각을 받치는 기둥의 높낮이로 조절하여 수평을 취하게 한 특이한 모습이다. 봉래루는 본래 1823년에 만세루(萬歲樓)라는 이름으로 중건된 것을 이후 봉래루라는 별칭으로 부르다가 1926년 봉래루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봉래루 지나 계단위로 대웅전과 석탑이 장엄하게 펼쳐진다.
원래 봉래루는 불교의 탄압기인 조선시대에 양반들이 말(馬)에서 내리지 않고 대웅보전까지 진입하여 예불을 올렸는데, 이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이보다 50cm정도 낮게 설계되었다고 한다. 즉 운주의 화암사와 같이 봉래루의 마루면이 대웅보전 앞마당의 바닥면과 거의 일치하였을 정도로, 누각을 통과할 때에 어른의 키가 닿을 정도의 높이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몇년 전에 1층의 기둥을 높이는 공사를 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 내소사 설선당(說禪堂)과 요사
설선당(說禪堂)은 스님들과 일반 신도들이 수학, 정진하는 곳이며, 요사(寮舍)는 스님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설선당은 조선 인조 18년(1640)에 청민대사(靑旻大師)가 창건하였다고 하며, 요사도 이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배치는 전면 중앙의 설선당을 중심으로 4면을 건물로 연결하고, 내부에 안마당을 둔 회자형(回字形)의 특이한 건축양식을 취하고 있다. 전면에서 보면 설선당이 좌측 건물 옆에 이어 지은듯하고, 우측은 요사채와 연결된 건물이 설선당과 마치 합각을 이룬 모습이다. 안마당에는 현재 우물이 설치되어 있다.
설선당 요사(寮舍)
설선당과 요사 앞의 산수유 나무에는 봄이 한창이다.
내소사 뒤에는 높이 433m의 관음봉(관음봉)이 솟아 있다. 그 관음봉을 그대로 본떠 지은 것이 설선당이다. 설선봉 앞마당에서 바라보면, 두 귀가 봉긋이 솟은것이 영락없는 관음봉이다. 설선봉과 관음봉이 그대로 겹쳐져 보인다. 설선당의 편액 글씨도 원교 이광사의 글씨이다. 역시 관음봉처럼 날아갈 듯하다.
설선당 아궁이
설선당의 무쇠가마솥..
설선당은 정면 6칸, 측면 3칸의 간략화된 주심포 맞배지붕으로 넓이는 34평의 규모이다. 건물 동쪽 측면 한칸은 마루이고, 전면의 남쪽 2칸은 난방을 위한 부엌으로서 거대한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다. 가구(架構)는 커다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설치하였다.
요사(寮舍)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넓이는 69평의 규모이다. 2층으로 구성되었는데, 1층은 현재 승방과 식당 및 부엌으로 사용하고 있다. 2층은 마루로서 식료품이나 기타의 물건을 저장할 수 있도록 각 칸의 벽면에 환기창을 시설해 놓았다.
이 설선당과 요사를 연결해 주는 건물이 북쪽 끝과 남쪽 끝에 2동이 있어서 회자형(回字形) 건물을 이루는데, 설선당 동쪽과 요사의 서쪽 서까래 일부를 발라내고, 건물의 용마루를 끼워서 두 건물 사이에 연결하였다. 그 북쪽 연결 건물은 설선당의 높은 대지와 요사의 낮은 대지를 연결하는 관계로 2층 건물의 내부 마당과 외부로 통하는 통로를 1칸 두고, 다른 1칸은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남쪽 연결 건물 2칸은 승방으로 사용하고 있고, 남쪽에 마루를 설치하였다.
○ 내소사 삼층석탑 (三層石塔)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4호
내소사 대웅보전 앞에 위치한 3층석탑은 2중기단으로서 화강암질로 되어있다. 하층기단은 전고 3.46 m, 폭 1.43m이며 1장의 석재에 지대석, 면석, 갑석을 각출하였고, 면석에 우주와 장주를 각하였다. 이갑석의 상면은 상대중석 받침쪽의 높은 경사를 이루고 중석받침은 2단으로 되어 있다.
상대중석의 경우도 모두 1매의 석재로서 면석에 우주와 면석중앙에 장주가 하나씩 모각되었다. 2단의 탑신받침 각출과 하단받침을 말각하였다. 이 갑석의 아래에 갑석부연을 각출하였고 탑신석은 각각 1매의 석재로 되어 있고 2층의 탑신석부터는 그 높이가 급격하게 체감되었다.
옥개석은 각층이 1배의 석재로 되어 있고 4단의 받침이 있다. 3층 옥개석 상면의 노반이 있는데 이 노반의 윗부분은 상대갑석과 같은 형태로 되어 있고 크고 작은 구형의 석재 2개가 올려져 있어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내소사 영산회괘불탱 괘불대
○ 내소사 무설당(無說堂)
정면 7칸, 측면4칸의 45평의 팔작지붕 한와지붕에 ㄱ자형의 목조 건축물로 해안선사의 “능가산의 유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 만허화상의 구전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50년 전까지 당시 서편에 지금의 동승당(東僧堂, 說禪堂)과 동일한 건물이 있었는데 동민의 부주의로 인해 실화소각을 당할 때에 사적까지 소실되었는데.....
이후 잡초가 무성하여 옛자취를 찾을 수 없고 1990년에 우암 혜산선사가 옛 고지에 현 무설당을 복원 건립하여 주지실과 승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 내소사 대웅전 (보물 제291호)
내소사의 대웅전은 1633년 (인조 11)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자연석으로 쌓은 축대 위에 낮은 기단과 거의 다듬지 않은 덤벙 주초를 놓고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집이다. 다포계 건물로 외삼출목과 내5출목으로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단청이 퇴색하여 오래된 나무결이 그대로 살아나 있어서 그 화려함이 부담스럽지 않다. 모서리 기둥에는 배흘림을 두고 안가둥은 민흘림을 두었다. 귀솟음과 안쏠림의 기법도 충실하게 이행되고 있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건물이 아주 안정감있어 보이게 한다.
내소사의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ㅁ'자 가람배치의 정점인 보물 제291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웅보전이다. 1633년에 만들어져 지금까지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조선 중기의 대표격인 전각이다. 전각의 단청은 모두 벗겨졌지만 ' 남길 것도 가져갈 것도 없느 무소유의 경지를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 '는 말을 실감하게 한다. 이렇듯 이름난 전각이지만 누가 어떻게 세웠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대신 숱한 설화들만 전하고 있다. 설화의 내용은 다양하지만 대부분 대웅보전은 호랑이가 화현(化現)한 대호선사(大虎禪師)가 지었고, 관세음보살상 등의 벽화는 관세음보살의 화현인 푸른새가 그린 것으로 통한다.
대웅보전 현판은 조선후기의 문인, 서화가, 양명학자로 이름 높은 원교 이광사가 쓴 글씨다. 그는 조선 4대 명필의 한 사람이다.
전면 기둥 사이 문들은 꽃창살로 장식되어 있다. 부처님이 설법하실 때 꽃비가 내렸다는 구절을 생각나게 한다. 연화와 국화꽃을 하나하나 조각하였다. 그 꽃들을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이 꽃을 하나하나 조각해 나갔을 조각가의 섬세한 손길이 절로 느껴진다. 우리가 내소사를 찾는 이유이고,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정면 창호는 2짝-4짝-2짝 구성으로 보다 더 안정감이 있으며 창호에는 정교하게 해바라기꽃, 연꽃, 국화꽃 등의 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그 새긴 모양이 문마다 다르고 섬세하고 아름다워 전설속의 목수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엿볼 수 있다. 수백년의 세월속에 채색은 다 지워지고 나무결 무늬만 남아있지만 만져보면 감촉이 참 좋다.
대웅보전 꽃창살
조선시대에 건립된 대웅보전은 전면에 꽃창살문을 달았다. 별개의 독립된 예술작품으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답다.
정면의 문짝에 새겨진 꽃창살무늬는 연꽃과 국화 그리고 모란꽃으로 가득 새겨져 있다. 원래는 채색(彩色)되어 있었으나 비바람에 씻겨 지금은 나뭇결이 다 드러나 있다. 자연의 손길이 한참동안 만지고 간 나무는 살의 근육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다. 색(色)도 사라지고 나무의 근육(筋肉)이 깊은 맛을 내고 있다. 바람이 지나가면서 쓰다듬고 빗물이 사선(斜線)으로 치며 쓰다듬은 흔적이다.
꽃문양은 우리 전통 문양 중의 하나이다. 꽃문양 이외에도 호랑이 문양, 용 문양, 봉황 문양 등 다양한 문양들이 전해지고 있다. 우리 조상들의 미의식이 얼마나 심오하고 깊은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는 증거들이다. 더군다나 문창살을 꽃문양으로 장식할 정도로 생활 미학이 발달되어 있는 문화민족이라는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소사 대웅전의 꽃문양 창살은 현존하는 사찰의 꽃살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어서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세월의 흔적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 낼 수 있다. 나무에 새겨진 문양 사이로 아름다운 색깔로 채색한 것도 보이고 세월에 의해 떨어져 나간 부분도 눈에 띤다.
극락의 문, 우리의 꽃살문은 아름다움과 장엄의 극치를이루고 있어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온다. 문살이 발달한 동양에서 우리의 꽃살문은 매우 독특한 성격을 갖는다. 중국의 문살은 지나칠 정도로 과장과 장식성이 풍부하다. 그 화려하고 세련된 모습을 보고 우선 놀라게 되지만 이내 식상해지고 만다. 일본의 문살은 격자와 간결한 의장에 세련된 선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그 문살이 예리하고 엄격하여 신경질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중국과 일본의 꽃살문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을 갖게한다.
이에 비하여 우리의 꽃살문은 오래 접해도 실증이 나지 않는다. 또 담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아무리 봐도 도무지 실증이 나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그 무엇의 아름다움이 문살 속에 숨어 있다. 우리의 꽃살문은 중국과 일본의 그것처럼 긴장할 필요가 없다. 편안한 가운데 아름다움의 쾌감을 주는 독특한 장식 미술품이다.
한국 불교예술의 정수라고 표현되는 사찰의 꽃살문은 세계 어느 나라 건축물에서도 좀처럼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유의 예술성이 깃든 조각품이며, 특정 종교의 예술로서의 가치를 넘어 우리 민족의 뛰어난 문화유산이다.
문은 이쪽과 저쪽 공간을 연결해 준다. 이쪽과 저쪽은 벽으로 차단되어 있다. 그 연결 통로가 바로 문이다. 사찰의 저쪽은 신성한 부처가 사는 극락의 세계이다. 이쪽은 고통을 안고 중생이 살고 있는 사바의 세계이다. 중생들이 이승의 티끌을 털고 부처님이 사는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경계는 지극히 환희가 넘쳐나는 곳이다. 이곳은 아름답지만 장엄으로 장식되어야 한다. 최상의 장엄은 그 소재가 꽃이 된다.
석가모니가 영산에서 마음과 마음으로 주고받는(이심전심) 방법으로 제자들에게 깨달음을 전했을 때의 자비로운 미소도 연꽃을 매개로 했다. 불교의 최고 경전인 법화경이나 화엄종의 명칭에도 꽃이란 글자를 사용하였다. 불교에서 꽃은 법이요 진리이며, 극락이다.
그 꽃과 문이 결합된 사찰의 꽃살문에서 유교사회이었던 조선사회 비주류들의 소박하고 순수한 심성이 묻어난다. 조선시대 사찰의 꽃살문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조선시대 불교는 건국 이후 수백년동안 천대받고 소외된체 대중속으로 들어간 민중불교이다. 대중들의 소박하고 꾸밈이 없는 정서를 꽃살문을 통해 담아내었다. 거기에는 긴장이나 격의가 없다. 포근함과 다감함이 배어 있다. 사용된 선 역시 우리 야산의 과장 없는 능선, 시골의 돌담길, 논두렁, 밭두렁의 선과 꽃을 담고 있다. 때문에 화려하기보다는 너무나 소박하다.
맨얼굴 절집이다. 수수하지만 정갈하다. 화장기 하나 없이 곱게 늙었다. 내소사 대웅전 단청은 무채색이다. 연꽃 창살무늬가 화려하면서도 소박하다. 세월의 더께가 새록새록 우러난다. 색깔이 지워져 마뭇결이 그대로 드러났다. 연꽃 국화꽃 문양 하나하나가 가슴에 그대로 새겨진다. 꽃살 문짝은 정면 3칸에 모두 8개가 있다. 정면에서 볼 때 오른쪽에서 3, 6번째 (사진은 오른쪽 1,4번째 - 사진의 좌우로 문 두짝식이 더 있다. 이것은 중앙의 4짝만 찍은 것이다.) 문짝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문짝아래에는 입을 다문 봉오리 모이지만, 문짝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점점 꽃이 벌어진다. 문짝 맨 위쪽 연꽃은 활짝 꽃잎을 열었다.
경건한 불교 신앙심이 민중 속으로 다가가 고려불교의 귀족적인 긴장감은 사라지고 소박하고 단순하며 따뜻한 정감이 서린 '꽃살문'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독특한 한국성을 지닌 문화유산이다. 사찰의 꽃살문은 대부분 부처를 예배하는 법당의 출입문에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부처를 경배하는 최고의 공양물이 꽃이기 때문이다. 또한 꽃살문은 부처와 중생을 이어주는 엄숙한 경계를 치장하면서도 그 안에는 우리네 어머니, 아버지의 삶과 같은 순수함과 담담함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극락의 문, 우리의 꽃살문은 아름다움과 장엄의 극치를 이르고 있어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온다. 꽃살문은 격자살문과 빗살문, 솟을살문 등 전통 사찰의 출입문에 새겨진 다양한 무늬를 말하며, 주로 교살문, 격자문살의 교차된 부분에 꽃무늬를 붙여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우리네 꽃살문은 단순한 형태의 낱살문과 띠살문부터 가장 화려한 솟을꽃살문에 이르기까지 그 스팩트럼이 넓다.
문틀 안에 세로로 살을 지른 형태로 장중하고 단순한 주심포 맞배집에 어울리는 '낱살문'과 널판에 모란, 연꽃, 새, 자라, 물고기 등 다양한 생물들을 투조하여 새긴 '통판투조꽃살문' 또는 아(亞), 귀(貴), 용(用) 등의 글자를 본떠 만든 '문자꽃살문', 사각형의 빗살을 상하좌우로 서로 잇대어서 배열한 것으로 주로 승방이나 요사채에 사용되고 있는 '숫대살문' 등이 유명하다. 이밖에 낱살과 띠살을 같은 간격의 사각형으로 짠, 일명 정자살문 또는 우물살문이라고 하는 '격자살문'이 눈길을 끈다.
내소사 대웅전 탈색된 단청 자욱에서 시간과 바람의 흔적을 느낀다.
대웅보전 안에는 석가 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고, 불화로는 영산후불탱화, 지장탱화 및 후불벽화로 '백의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는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불단의 기둥을 뒤로 물려 넓은 내부공간을 이루며 상부의 포작들은 연꽃봉오리모양으로 조각되어있고, 천장에도 가득히 장식을 했다. 안팎모두 장식으로 충만해 있지만 적절히 절제되고 통일되어 있어서 번잡한 인상은 주지는 않는다.
보물제1268호 영산회괘불탱
의외로 닫집은 수수하게 단청으로 처리했다.
대웅전 수미단
내부의 후불벽은 측면의 기둥열에서 약간 뒤로 물러나면서 내부공간을 확보하고 후불벽을 형성하였고 대웅보전 삼존불상의 뒤로 돌아가면 후미진 후불 벽 뒷부분에는 유명한 백의수월관음도(白衣水月觀音圖)가 그려져 있다. '백의관음보살좌상' 그림은 바위에 앉아있는 백의를 입은 관음을 묘사한 것으로 조선말기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백색의 天衣는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는 관세음보살의 특징을 잘 잡아낸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로 수월관음도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대웅보전 안에 후불벽화 '백의관음보살좌상'은 황금빛 날개를 가진 새가 그렸다고 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 인간의 솜씨를 넘은 성스러운 모습이다. 관음보살님의 눈을 보면서 좌 우로 왔다 갔다 해보면 관음보살님 눈동자가 내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움직이는데(물론 사람에 따라 안보일 수도 있다.), 눈동자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 속설이 있다.
용이 물고기를 물고 있다.
대웅보전의 내부는 이곳이 불국토(佛國土)구나 느낄 만큼 장식적이다. 대들보 위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호법용(護法龍)들, 천장에 날아 다니는 극락조, 불국토에 태어 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다양한 모습의 연꽃들 그리고 천장과 대들보 사이에 그려진 10여종의 樂器 공후, 생황, 바라, 소, 박 등이 모든 것들을 불국토(佛國土)에서 부처의 설법에 환희하며 기쁨을 나타내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대웅보전 천정에 그려져 있는 악기(樂器)들.
비워진 충량
보물 제291호인 대웅전은 목침으로 제작되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상부에는 목침한개가 부족하다.
대웅전 꽃게 무늬 단청
여기에 천장에 기어 다니는 게 몇 마리를 둠으로써 내소사가 해중사찰(海中寺刹)임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렇게 몇가지 함축적인 상징물로 대웅보전을 불국토로 만들어버리니 우리는 이래서 그 매력에 듬뿍 빠져들 수 밖에 없다.
비워진 단청
대웅전과 관련된 창건설화
실바람에도 청아한 소리를 내는 풍경소리가 아름답다.
탑과 대웅전과 산능선의 조화, 편하고 고요하고 맑다.
○ 내소사 벽안당 (碧眼堂)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동편에 있으며, 1911년 관해선사가 벽안당이란 선실로 건립하였다.
2002년 다시 진원 주지스님이 신축하여 회주실(會主室)로 사용하고 있다.
○ 내소사 조사당
조사당(祖師堂)은 조사전(祖師殿)이라고도 하며, 조사(祖師)스님을 모신 당우로서, 처음에는 중국의 초조(初祖)인 달마대사를 모셨으나, 뒤에는 한 종파를 세운 스님, 존경받은 스님들을 모시게 되었고, 요즘에는 더 나아가 그 절의 창건주, 역대 주지(住持)스님의 영정이나 위패를 모시기도 한다.
○ 내소사 지장전
○ 내소사 삼성각
내소사 경내의 최상단부에 삼성각이 있다.
이 삼성각은 칠성과 독성 그리고 산신을 모시는 전각을 말한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토속신앙으로 산신각이 위치 좋은 산 자락에 들어서있었다. 그런데 불교가 들어오면서 절터를 잡으려는 명당자리마다 산신각이 자리하고 있어 할 수 없이 그 아래쪽에 절을 짖게 되었다. 그때부터 토속신앙이 불교와 융합된 것으로 보여진다.
어떤 절에서는 산신각이란 전각을 그대로 보존 하기도 한다.
삼성각 내부에 좌우로 산신령이 모셔저 있다.
민간신앙에서는 산에사는 명물로 호랑이를 산군으로 모시기 때문에 산신은 언제나 호랑이를 거느리는 것
으로 표현하고 있다.
두 손을 합장하고 산신께 소원 하나를 빌어본다.
○ 내소사 진화사(眞華舍)
정면 3칸, 측면2칸의 17평 목조 팔작 한와건물로서 그 사료는 찾을 수 없으나 1988년 옛터에 우암 혜산선사가 건립하여 한주실 (閑主室)로 사용하고 있다.
○ 내소사 화승당
현재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다.
○ 내소사 템플스테이
이곳은 요즘 사찰들의 템플스테이 장소다.
○ 내소사 봉래선원
옛터에 세운 32평 규모의 목조한와 팔작지붕의 양식으로 1998년 우암 혜산선사가 스님들의 참선정진을 위해 건립한 선원이다. 이 선원은 내소사를 중창시킨 해안선사의 뜻을 계승하고, 혜산선사가 호남선풍을 진작시키기 위한 원력으로 건립하였다. 선원은 지난 2001년부터 선객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눈 푸른 수행납자들이 참선 정진하고 있다.
불이문을 지나면 능가산 아래 봉래선원이 드러난다. 봉래선원의 부속 건물로는 요요당, 본연당, 적적당, 등 욕실 및 화장실을 겸비하여 납자들이 수행하는 데 조금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선원의 위용을 갖추고 있다. 현재 봉래선원에는 한벽 철산 선원장 스님을 모시고 10명의 선객들이 정진수행 중이다.
중턱에 있는 암자를 줌으로 댕겨본다.
○ 내소사 400년 묵은 해우소
해우소(解憂所) .. 말 그대로 근심을 푸는 곳, 절에서 화장실을 일컫는 말이다. 전북 부안 내소사의 "해우소"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재래식 화장실 가운데 하나이다.
부안 능가산 내소사, 입구에 늘어 선 600m길이의 전나무 숲과 대웅전 창살문이 내소사의 이름을 높여 주고 있지만 숨겨진 명물도 있다. 바로 거의 400년 묵은 해우소, 조선 인조11년 (1633) 청민스님에 의한 중창 불사 당시 세워져 현재까지 原形 그대로 보존된 것으로 전해진다.
8평 남짓의 아담한 고건물에는 3칸의 "超 재래식" 변소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뒷간 그대로의 모습이다. 지금까지도 스님들이 근심을 푸는곳으로 사용된다. 늙은 불곰을 연상시키는 바깥 모습이 이채롭다.그러나 무엇보다도 반천년 동안 오래고 고된 풍화를 견디며 오늘날까지 버텨왔다는 사실이 더욱 신비하다.
똥이 쌓이면, 중간 중간에 톱밥을 뿌려주면 냄새도 안 나고, 훌륭한 퇴비가 된다.
○ 내소사 수각
절마당 한쪽에 거대한 연꽃모양의 샘터가 눈길을 끈다.
용의 머리를 조각했고 그 위에 거북을 안치했다. 용의 입을 통해 흘러내리는 샘물을 마셔보니 물맛이 좋다.
좋은 절이 들어선 명당자리에는 반드시 풍부한 수량의 맛잇는 샘물이 있다. 실지로 이름난 절에는 이렇게 좋은샘물이 있기 마련이다. 절마당을 한 바퀴 돌았더니 목이 말라 두바가지를 마셨다.
○ 내소사 전경
능가산 아래 수행도량으로서 옛모습을 간직하고 잇는 고색창연한 절집의 당우들을 한바퀴 돌아보고
천왕문을 빠져나간다. 천왕문을 나와 벚꽃길을 지나면 오른쪽에 내소사 부도전이 있다.
○ 내소사 부도전
일주문을 지나 전나무길을 한참 걷다 보면 왼쪽에 부도전이 보인다. 9기의 부도 가운데 앞줄 4기는 명문이 있어 부도의 주인을 알 수 있으나 뒷줄 5기는 미상(未詳)이다. 앞줄은 왼쪽부터 능파당, 만허당, 관해당, 해안당으로 근대의 부도이며 뒷줄은 조선 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범부 해안지비 凡夫 海眼之碑
해안(海眼)스님의 부도 앞 비석에는 ' 해안범부지비(海眼凡夫之碑) '라 쓰여져 있다. 뒷면에 탄허(呑虛)스님이 쓴 비문(碑文)에는 .. 生死於是 是無生死. 생사가 이곳에서 나왔으나, 이곳에는 생사가 없다 ...라고 쓰여 있다. 해안스님이 입적(入寂)한 후 제자들이 오대산(五臺山)의 탄허(呑虛)스님을 찾아가 어렵게 부탁하여 받은 글이라고 한다
부도전을 보고 숲길을 지나 가슴에 담았던 녹색 싱그러움을 만끽하며 느릿느릿 일주문으로 향해본다.
내소사 일주문을 나서면 정겨운 풍경이 펼쳐진다...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변산.
산은 산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깊고 푸른 숲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우리나라 유일의 해안과 산지를 동시에 끼고 있는 해안․산악형 국립공원이다.
해안 쪽의 외변산은 수만 권의 책을 쌓은 듯한 채석암과 노을이 아름다운 적벽암, 바다의 여신을 모신 수성당, 하섬의 싱그러운 바닷길, 그리고 격포항까지 바다의 생명력이 넘친다. 내변산은 기암괴석의 절묘한 산봉우리들, 천년고찰 내소사의 은은한 역사의 향기가 흐른다.
외변산과 내변산, 해안절경과 내륙비경으로 천의 얼굴을 가진 변산을 돌아보는 귀한 시간이 내게 주어짐에 오늘도 감사의 마음을 내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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